고양이는 어디에나 있어요
내가 '딸'을 만난 건 펫샵이 즐비한 거리의 횡단보도 앞 오래된 작은 샵이었다.
십여 년 전 나와 지금의 남편이 같이 지내던 다세대주택의 옥탑방에는 고양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오래된 주택들 지붕을 묘기하듯 넘나들며 우리 옥상에 까지 침범하던 저마다 알록달록한 고양이들은 오후 햇살이 들면 우리 집 뒷 베란다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기도 하고 똥을 싸기 딱 좋게 생긴 옥상 텃밭을 뒤집어놔 주인 할머니께 호된 야단을 맞기도 하며 우리와 공생했다.
나와 남편이 베란다 문을 열고 야식이라도 먹는 새벽이면 고것들이 냄새를 맡고 방충망 앞에 염치도 없이 겸상하자며 앉았다. 우리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심정으로 편의점에서 파는 고양이 캔을 하나씩 줬었는데 어느 날 새끼까지 줄줄이 달고(쪼매난 새끼들이 어떻게 옥상에 올라왔는지 모를 일이다) 밥 내놓으라, 문 열라 고함을 지르던 염치없던 얼룩 고양이가 있었다. 우리는 결국 그 녀석 때문에 고양이 밥을 준 것을 들켜 주인 할머니께 혼이 나고 고양이 배식은 그날로 끝이 났다. 그래도 눈칫밥 꽤나 오래 먹은듯한 그 녀석들은 밥 냄새가 없다 싶었는지 그날 이후로 오지 않아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이 섭섭하기도 했었다.
십여 년 전, 그렇게 어디서나 고양이가 흔한 곳에서도 그 오래된 주택가에서 조금 벗어나면 펫샵이 길 양쪽으로 번성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곳에 몇몇 샵들이 남아있다.
우리의 첫 가족인 '딸'은 그 거리에 있는 횡단보도 앞 작은 펫샵의 고양이었다. 우리의 옥탑방으로 가기 위해선 그 횡단보도를 꼭 지나야 만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샵을 매번 지나쳐 다녔다. 그 가게 안 쇼케이스에서 엄마 고양이와 함께 들어있던 딸은 아기 고양이라 하기엔 다소 크고, 다 큰 고양이라 하기에는 작았다. 옆칸, 옆 옆칸의 고양이들은 고양이라 부르기도 뭐한 작은 존재들이 애기 주먹만 한 제 몸을 아무것도 없는 허허한 공간에서 스스로의 온기에만 의지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다리도 길쭉하고 귀도 쫑긋이 올라간 이 아이는 좁은 사각 공간 속에서 천방지축으로 굴며 엄마를 괴롭히기 바빴다. 그러나 엄마 샴고양이는 그런 아이에게 어떠한 미동도 없이 엎드려만 있었다. 알 수는 없지만 어떠한 체념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하기사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었다. 4~5개월 령의 이 아이는 아무에게도 갈 수 없을 거란 걸. 누구도 그렇게 큰 고양이를 사가지 않을 것이란 걸.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에 그곳을 매번 지나쳤고 그 아이는 그때마다 매번 그곳에 있었다.
어느 휴일, 갑자기 남편과 나는 아예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면 어때?라는 생각을 했고 고양이 캔을 들고 하루 종일 동네를 뒤졌지만 우리 집에 오던 그 얼룩 고양이들을 만날 순 없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소득 없이 집으로 가던 중 그 가게에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남편과 둘이 눈이 마주쳤다.
"얘 좀 불쌍하지?"
그래 좀 불쌍해. 쇼케이스에서 예쁘게 포장되어 팔리는 고양이들 말고 그곳에서 쑥 자라 버린 고양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계속 자랄 텐데.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가게로 들어가 이 아이에 대해 물었다. 가게의 주인은 그 아이를 '딸'이라고 불렀다. 가게 주인은 다른 샴고양이들보다 낮은 가격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팔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는 다른 고양이들을 보여주며 권했다. 우리는 이 아이를 바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주인은 좀 멋쩍어하며 자신이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같이 데려가면 어떠냐 물었다. 그러면서 더 어렸던 고양이는 '아들'이라 불렀다. 우연하게도 아들도 샴고양이 었다. (그는 암컷 개체는 모두 딸, 수컷 개체는 모두 아들이라 부르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십오만 원을 가게 주인에게 주고 딸과 아들을 종이상자에 담아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우리는 진짜 딸과 아들처럼 키우자며 그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딸은 온 첫날부터 제 집처럼 천방지축으로 굴었고 그에 비해 작았던 아들은 며칠을 밤새 삐약삐약 울며 낯을 가렸다. 오랜 시간 케이스에서 살았던 딸은 예방접종 뒤에도 귓병이나 설사, 장트러블 등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잔병으로 병원에 가는 일이 많았다. 가게 주인이 우리에게 샴고양이 두 마리를 건넨 것은 내 지레짐작 일지 모르지만 딸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건 아닐까 싶다.(하지만 딸은 건강검진 때마다 큰 이상 없이 잘 살고 있다.)
정을 주지 않을 것 같던 아들은 어느 날 자고 있던 내 머리맡에 와 슬며시 몸을 기댔다. 스스로의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을까? 아니면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되어 마음을 열어준 것일까?
재밌게도 고양이의 유아기 때 성격은 다 자란 개체가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아들은 여전히 내 머리맡을 좋아해서 베개를 침범하고 딸은 여전히 철이 없다.
살며 가끔씩 딸이 그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해 본다. 내가 그저 무심하게 지나가는 행인이었을 때를 말이다. 그 상자에 사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길고양이들은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하다. 고양이를 조금만 알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고양이는 쇼케이스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고양이를 쇼케이스에 넣고 사고판다. 이처럼 인간은 소비에 있어서는 잔인할 만큼 공감능력을 상실한다.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은 모조리 다 값이 매겨지고 팔리기 위해 전시된다. 사람들은 전시된 것들을 산 자신을 자랑하듯 전시한다. 심지어 더 귀여운 고양이의 외모를 만들기 위해 종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한 유전병으로 태어난 생명들이 고통받게 하는 것은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서 고양이가 무척 예쁘다며 샴고양이 비싸지 않아요? 하고 물어본다. 그런데 나는 이 녀석들을 만나기 전엔 샴고양이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원숭이를 닮아서 못생겼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런 얼굴이 사람 같은 표정이라 재밌다. 오히려 좋아?) 그때 그 샵의 고양이가 털이 무슨 색이었든 간에 딸은 우리와 함께 집에 갔을 것이다. 겪어본 결과 고양이의 털 색깔이 어떻든 간에 고양이는 다 고양이다. 저마다 다른 우주를 갖고 있는 생명체인 것은 우리 사람과 동일하다. 부디 고양이 입양을 원한다면 쇼핑하듯 가족을 고르진 말았으면 한다. 쇼핑은 백화점에서 하면 된다.
혈기왕성한 시절을 케이스에서 살아야만 했던 딸은 그래서 그때 못한 우다다를 10살이 되어서까지 하는 모양이다. 철이 없다. 아들은 아직도 울보고 아기 같다. 그래서 나는 이 고양이들이 너무 좋다. 하지만 이 들을 사랑할 수록 펫샵의 주인에게 십오만원을 지불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아직도 있다. 그 산업의 사이클에 일조한 것이니 말이다.
점점 더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사회에선 인간도 존중받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 그 피해는 환경파괴나 생태계교란 같은 형태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당신의 고양이는 어디에나 있다. 묘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불현듯 어딘가에서 인연처럼 만나게될 고양이가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