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에 한참 빠져있을 시기였다. 뇌 장애를 겪는 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었는데 한 사례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교통사고로 감정을 다루는 뇌의 영역에 손상을 입은 분이었는데 슈퍼마켓에서 야채 하나 고르는 것조차 결정할 수가 없어 무척 괴로워하셨다. 극 효율충인 내게 오랜 시간 "감정"은 믿지 못하는 것, 주관적이며, 사고를 흐리는 것 등 안 좋은 것으로 치부되곤 했는데 그 사례를 보고 처음으로 감정의 강력한 역할을 인지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안전주의적 성향이 강해 행동에 앞서 늘 계획이 선행되어야 했었는데 정작 인생의 큰 결정은 일명 마음의 소리를 따랐던 적이 더 많다. 감정이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까지 크다는 것을 이해하자 왜 때때로 성취물들을 축하해야 할 순간에 진이 더 빠졌었는지 조금을 알 것 같았다. 효율과 생산성에만 몰두하다 보니 너무 오래 감정을 묻어 놨던 것이다. 사람이 ChatGPT처럼 수많은 데이터를 쌓아 지능적인 면만 업그레이드하면서 살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에겐 감정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생각보다 사람의 많은 것을 지배하고 결정한다.
실제로 burn out은 업무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섭섭하거나 서운한 감정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감이 많이 된다. 신나서 일을 할 때는 잠이 부족해도 쌩쌩하고 머리가 총명하게 돌아간다. 사활을 걸고 뛰어든 일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때엔 더 자고 더 여유가 있어도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훨씬 나아졌지만 효율성은 일은 물론 내 일상 전반을 지배하는 주 신념이자 생활방식이었다.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다음의 것들이 있다.
읽고 싶은 글이나 팟 캐스트가 있으면 gym에 가서 treadmill에서 걸으면서 듣는다. 읽을거리는 Text-to- Speech 지원이 되는 것만 미리 선별해 둔다. 뛰는 경우는 드문데 그럴 땐 주로 야외로 나가거나 단거리 마라톤에 참여한다. 이때도 뛰기 자체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정신적 찌꺼기를 떨치는 것이 목적이다.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도로의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한 통근 시간의 변화가 싫어 주야장천 지하철만 고집한다. 운전을 좋아하지만 교통 체증 시 도로에 꼼짝없이 정체되어야 하고 그 시간을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하는 것을 택하자니 역시 지하철이 효율적이다.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신기하게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 집중이 그렇게 잘 된다.
가끔 마사지는 받지만 네일 아트는 받지 않는다. 마사지를 받는 동안은 잘 수가 있으므로 자는 시간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지만 네일 아트를 받는 동안에는 수다 외에는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 그것도 낯선 이와의 대화는 너무 어려운 것이기에 돈 내고 스트레스가 더 크다.
이 같은 생활 방식이 건강하지 않다 늘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감정을 오랫동안 모른 채 한 것에 대한 청구서의 대가를 꽤 크게 치렀다. 그 이후부터는 아주 찬찬히 마음과 시간에 쿠션을 두기 위해 노력한다.
7시간 수면 확보가 일찍 기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미라클모닝의 핵심은 새벽 기상이 아니라 일에 매몰되기 전 (출근 전) 나만의 시간 확보에 있다.
멍 때리고 TV를 봐도 괜찮다. 허구고 실익이 없으면 어떠한가. 불멍처럼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의 스위치를 이 멍때림이 도와줄 것이다. 비효율적인 상태가 아니라 충전을 하는 것이다.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처럼
주말 중 하루 침대에서 등이 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역시 충전 중이다. 사양이 아무리 좋으면 뭐하나 배터리가 꺼지면 사용할 수가 없는데
의미 없는 대화를 하는 것도 괜찮다. 잡담과 유머의 파워가 꽤 크다. 기분과 생각을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나는 ChatGPT처럼 효율과 생산성의 목적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난 김에 이왕이면 열심히 살아보자는 거지. 그러니 볶아치즘 노노.
게으름이라는 거. 어쩌면 산업시대 기득권 층이 노동자에게 최대의 효율을 얻기 위해 만들어 낸 프레임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