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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돋움 Jan 03. 2024

눈빛의 대화.

나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양손에 쥐고, 후~불어내고, 홀짝 들이마시고, 뜨끈한 그것을 목구멍 아래로 삼켜내려 컵에서 입술을 살짝 떼어내는 일련의 동작을 모니터를 바라보며 계속이어가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닿아 있는 모니터는 책장을 펼쳐놓은 듯 양쪽 어깨를 맞댄 체 기대 있고, 그 속엔 5개의 엑셀시트들이 참고 자료와 작성 자료로 적절히 공간을 배분한 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봤다면 심도 있게 자료를 분석하고 있는 중이라 생각할 것이다. 혹은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골몰하고 있거나, 엑셀 수식이 풀리지 않아 일전에 어떤 서식을 썼더라? 생각하는 중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제 이미 작성을 마친 허무맹랑한 자료가 내가 작성한 게 맞는지 의문스러워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은 자료의 내용이 아니다. 가장 커다랗게 뛰어진 엑셀 화면의 자료입력을 기다리는 깜빡이는 커서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깜빡이는 커서 너머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눈빛이다.


어제저녁부터 강설예보, 결빙주의 안전문자가 휴대전화 화면에 눈 쌓이듯 소복소복 쌓이길래, 내일아침은 차에 쌓인 눈 처리로 분주하겠구나 예상했다. 그러나, 아침에 확인한 베란다 너머 아파트 주차장은 차량들 위로 드문드문 쌓인 희끗한 눈이 새벽에 한차례 눈이 왔음을 보여주긴 했지만, 눈이 비로 바뀐 지 제법 된 모양인지 아스팔트 바닥이며 담너머 도로도 눈이 아닌 비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번 겨울은 비가 참 많네~]

눈이 오면  차량 앞, 뒤 유리며, 범퍼에 얼어붙은 눈을 시린 손 불어가며 출근 전 바쁜 손놀림으로 긁어내야 하고, 얼어붙은 도로에선 수동기어로 슬금슬금 거북이 운전을 하며 출근해야 한다. 거기다, 녹은 후에는 늘쩍지근하게 들러붙은 흙먼지가 눈에 거슬릴게 뻔해 주말사이 세차계획도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눈을 반기기는커녕 좀 덜 왔으면 하는 기색이 역역해 졌다. 똑떨어지는 결과, 효율성, 편리성을 쫒으며 살다 보니 감수성, 공감, 수용, 이해는 자꾸만 뒤로 내쳐지는 것만 같아 입안이 씁쓸해져 왔다.


벌써 방학을 시작해 엄마아빠 출근 전까지도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는 첫째는 두고, 다음 주 방학을 앞둔 둘째를 데리고 겨울비가 추적거리는 등굣길을 여느때 처럼 차를 몰고 나섰다. 아이 학교 입구를 목전에 둔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길 중간 즈음에 희끄무리한 솜뭉치 같은 게 보였다. 처음엔 누군가 떨어뜨린 쓰레기봉지려니 했는데, 50미터 전쯤 가까이 다가가니 그것은 길중앙을 총총히 걷고 있는 작은 강아지였다. 

[저기요 강아지 양반 저 좀 지나갈게요~]

좁은 골목 중앙을 비킬 줄 모르고 당당히 걸어가는 듯 보이는 강아지에게 장난 어린 혼잣말을 하면서도 혹여 놀랠까 클랙슨 한번 울리지 않고, 서행하며 강아지 뒤를 따랐다. 그런데, 차가 가까워진 걸 인식했던 모양인지 강아지가 갑자기 좁은 골목을 갈지자를 그리며 종횡무진 오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과잉행동에 혹여 차에 부딪힐까 걱정스런 마음에 차를 세우고 강아지를 예의주지하던 그때 횡설수설 걸어가던 강아지가 마침내 힘겨운 듯 몇 번의 곁눈질 끝에 겨우 나를 올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연 속 비명 섞인 눈빛. 서늘한듯 애처롭고, 애절한듯 처절해 보이는 그 눈빛 교환 한번에 나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그 강아지는 내 차를 보고 불안하고 공포에 찌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힘에 겨워  몸서리를 치고 있었던 듯 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그 강아지의 행색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몸을 뒤덮은 때 묻은 털은 듬성듬성 빠진 데다 고르게 펴진 곳 없이 뭉쳐져 있었고, 귀는 얼굴 옆에 찰싹 붙어 두터운 털인 양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오른쪽 뒷다리는 불편한지 걸을 때 제대로 펴지 못해 때어 놓는 걸음마다 짧게 총총거릴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끼니를 허기로 지내며 보낸 과거를 여실히 보여주는 그 아이의 도드라진 갈비뼈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두려움인지 추위인지 기원을 알 수 없는 떨림이 강아지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대체 이 아이는 무슨 일을 겪었길래...

나는 아이 학교 등교도 잊고 길 중앙에 세운 차 안에서 가방을 휘져으며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는 다행히 어제 후배가 준 크래커 한 봉지가 손에 잡혔다. 봉지를 발견하고 차에서 내리려던 찰나 시야에 있던 그 아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차량 앞유리를 내리고 떨어지는 빗방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위를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샅샅이 훑어도 어디로 몸을 숨겼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차량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고, 주차해놓은 차량 사이로 비켜설수 없는 길에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나는 계속 그 눈빛을 생각했다. 내게 뭔가를 말하는 것 같은 그 눈빛에 나는 깜빡이는 커서 위에서 처럼 무언가를 그 아이에게 정확히 입력해 주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놓아 버린 듯도 한 그 눈빛. 낯설지 않은 듯도 한 그 생경한 눈빛을 나는 일전에도 본 적이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묘지에 있는 고아 소녀(1824년)'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고, 돌봐줄 친척도 갈 곳도 없는 소녀가 해질 무렵 공원묘지에 홀로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절망적인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눈빛과 그 눈빛은 매우 닮아 있었다.


나에게 눈빛으로 무언가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던 그 가녀린 강아지의 고달픈 삶에 대해 나는 크러커 한 조각만큼의 위로도 전해주지 못했다. 저녁이면 영하로 뚝뚝 떨어지는 겨울날씨인데, 비까지 오가며 몸도 젖었을 텐데, 그 아이는 또 굶주린 배를 이끌고 어디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까?




커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나를 신랑이 보낸 카톡 하나가 다시 현실로 소환시켰다.

[사무실에 화분이 들어왔어. 가져갈까?]

식물 키우기를 즐기는 나에게 신랑은 이쁘다 싶은 화분이 들어오면 잊지 않고 키울 의사를 묻곤 한다. 집에 이미 화분이 13개나 있어서 잠시 망설여졌다.

[화분이 들어오면 사무실에서 누가 그걸 잘 키워주나?]

[아니. 화분 들어오면 몇 달 있다가 다 죽지. 화분 돌보는 사람이 없어.]

[그럼. 데려와 내가 키울게]

[응]

이러다 식물원 주인이 되겠다 싶어도 어쩔 수가 없다. 일주일에 한 번 흠뻑 물을 부어주고 분무만 해줘도 어여쁜 새싹을 틔우는 귀여운 생명인데... 하물며 작은 식물도 생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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