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悲情)한 도시와 비통한 추모
대만영화 중 변동의 대만역사 속에서 처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한 가족의 연대기를 다룬 ‘비정성시(悲情城市, City of Sadness)’라는 영화가 있다. 말 그대로 비통한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도시(공동체)를 의미하는 제목이다.
이태원 참사 100일이 흘러가고 있다. 연대와 공감의 마음으로 참사 100일 추모식에 참석하러 광화문에 나갔었다. 추모인파 건너편에 서서 확성기 소리로 각종 비아냥거림과 혐오로 가득찬 독가시 같은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로 인해 귀에 피가 흐르는 듯했다. 어느 순간 제대로 된 추모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유가족들과 분향소 설치를 막아선 경찰들과의 대치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서울이라는 이 도시야 말로 지금 ‘비정성시’다”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추모라 함은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위로를 표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일부 혐오주의자들은 추모 인파와 고인들의 가족과 지인들을 향해 ‘이태원 간 것이 자랑이냐’, ‘놀다 뒤칠게 추모 대상이냐’, ‘네 자식 팔아 돈방석에 앉아 보려고’등 차마 옮기고 싶지 않으나 그러나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할 수많은 악다구니를 쏟아 붓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순수한 피해자를 찾는 문화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 유독 횡횡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순수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전형적인 2차가해의 방식임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어느 특정 장소에서, 좋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 순고한 배경을 가진 채 피해자가 되어야만 마땅히 그 피해가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은 해괴한 발상이다.
어쩌면 기득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교묘한 여론 선동이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마땅히 사건은 사건 그 자체로만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그 어떤 이력과 배경에 마땅히 피해를 받아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논리는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건을 저지르고 피해를 만들어낸 가해자의 잘못된 의도와 행동만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 대상이다.
스스로 책임과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책을 이야기하던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 광장에는 분향소를 설치 할 수 없다는 것은 또 어떤 논리인가.
이름도 얼굴도 없는 위패를 모셔놓고 고개를 숙이던 대통령의 ‘자기만족용 분향소’를 추모의 공간으로 방치해 주었던 기억은 잊은 것인가.
당시는 부러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이제야 진짜 유가족들이 주체가 되어 희생자들의 사진을 내걸고 실시하겠다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을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서울시(서울시장)의 행정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조치에 만약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치적 노림수가 작동한 것이라면 이는 분명 시민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참혹하고 비극적인 일 일수록 사건 그대로를 드러내고 진단받아야만 그 안에 과오가 무엇인지 분명한 판단이 가능하다. 숨기고 감추어서는 절대 제대로 된 진단이나 방지를 위한 사전 교육일 될 수 없다.
이태원 참사를 결코 정치적 유불리로 다루거나 내편과 아닌 쪽을 가르는 수단으로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가 처음은 아플 지더라도 종국에는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참사의 추모 공간인 분향소가 더 많은 시민이 함께 할 수 있고, 유족이 원하는 방식으로, 반드시, 관철되어 더 이상 서울이 ‘비통의 도시’가 아니라 ‘치유의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