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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악한 세상에 돌연변이의 출몰이 필요하다 ] 칼럼리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한 고(故)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건과 관련해 얼마 전 2심에서도 원청 사장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같은 날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가 석탄 하역 작업 도중 한국중부발전 보령화력발전소에서 사망했다.

결국 우리 사회가 만든 견고한 원청과 하청이라는 노동착취 시스템은 노동자는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물품으로 취급 받아도 되며, 그 과정에서 일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더라도 그 책임은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노동자 완전 활용법’을 자본권력에게 다시 한 번 확인 시켜 준 격이라 여겨진다.

경쟁 만능주의 사회 문화 속에서 일부 시민들은 노동을 하다가 기계에 끼이거나, 압사 당하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해서 죽고 다치는 일은 나에게는 해당이 없다 여기는 듯, ‘그러게 그런 일을 누가 하라고 했나’, 혹은 ‘대기업 정규직으로 들어갔어야지‘, ‘공부 열심히 하지’,’일 제대로 했으면 저런 일이 발생했겠어’등의 말까지 쉽게 내뱉는다.

얼마 전 개봉한 ‘다음 소희’라는 영화가 있다. 딱 이 영화가 이런 원청과 하청으로 나누어 임금을 줄이고 책임을 면제받는 자본권력 중심의 사회상을 고발하고 있다. 더 많은 취업실적 올리기에 매몰된 학교 시스템과 이를 인해 부당함에 입 다물 수밖에 없는 노동자를 악용하려는 노동현장은 노동자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모는 다양한 방법을 선보이지만 극한의 노동환경에 내몰린 노동자는 그 어느 곳도 기댈 곳이 없다.

이 잔혹한 ‘최소 비용 최대 이윤 추가 방식의 가해’는 영화 배경인 하청업체인 한 콜센터 안에서 자행된다. 그러다가 정작 과도한 업무 종용이라는 극한의 노동환경에 내몰린 노동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 노동자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과 책임은 원청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법제도 안에서는 하청업체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단 하나의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아무도 책임질 주체가 공식적으로 없는 상황, 이런 연유로 현재 우리 사회 많은 노동현장에서 업무 환경의 극악함으로 인해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 노동자는 그냥 맡은 일도 제대로 못해 죽은 ‘하급 인간’정도로만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몇 장면은 내가 근무했던 항공사의 모습과도 닮아있었다. 승객 안전과 보안이 승무원의 주 업무라 회사가 알려주던 것과는 달리, 재벌 총수 일가가 세운 면세품등 공급 회사들의 ‘통행세’ 이익 증대를 위해, 회사 전광판에 오늘의 면세 판매 우수실적 팀과 최저 팀을 공개적으로 띄워놓고 저성과자를 공개적으로 모욕 주던 방식과, 면세품 판매 실적을 인사 고과와 연계 시키고, 인센티브를 미끼로 엮어, 최고 판매 팀이 되기 위해 착륙 준비가 더 우선인 상황에도 면세품 판매 카트를 밀고 다녀야 하던 상황 등은 대기업 정규직으로 일했던 나의 경험이나 영화 속 비정규직 소희의 경우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땅콩회항 사건을 이야기해본다. 단순한 갑질폭행 사건이라 치부되는 이 사건을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여러 노동현장에서 자본이 노동을 다루는 시각이 얼마나 위악한 면이 있고, 또 그런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노동자를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나 생명으로 대하지 않는지 등의 문제가 겹겹이 쌓여 분출된 사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노동 가치와 노동권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본권력 우선주의 문화가 더해져서 발생한 ‘노동 혐오 범죄’라 정의하는 이유다.

여전히 위해하고 노동자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는 노동 환경을 보자면, 거대 자본권력과 이들을 단단히 보호하고 있는 제도들을 상대로 저항한 땅콩회항의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돌연변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자본 권력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 속에서 잘못된 제도와 환경에 저항하는 또 다른 돌연변이들은 노동현장에 제대로 적응 못한 ‘하급 인간’이라 지칭된다. 그러나 이런 조롱에도 불구하고 다음 돌연변이는 여전히 긍정적 의미로 우리 공동체 안에 필요하다.

근래 자행되는 노동을 상대로 한 국정 운영과정과 법의 심판들을 보자면, 과연 제대로 된 사람대접 받기가 가능한 부류의 시민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도 든다.

새로운 물결이 필요하다. 세상일을 다루는 사람들을 바꾸어 제도와 구조 등 전반의 시스템을 바꾸어야한다. 그래야만 그나마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의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대체품 취급되는 공동체의 미래는 절망뿐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이 위악한 세상에 ‘다음 소희’와 또 ‘다음 돌연변이들’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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