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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게 친절한 언론은 없다.]

한때 포털 검색어 1위를 달리며 언론에 과하게 노출된 적이 있다. 바로  사건 ‘땅콩때문이었다. 평범한 시민이자 참혹한 사건의 피해자 이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나라 언론의 추악한 뒷모습을 목격하고 절망했었다.

 당시 심하게 앓았던 ‘공황장애’와 ‘초조 및 불안’ 그리고 ‘불면증’은 대부분 언론의 과잉 추적과 허위 보도 때문이었다. 현관문 초인종을 새벽 세시에도 누르고, 하루 종일 기자들의 전화로 울려되는 전화, 우편함에 있는 개인 우편물까지 마구 찍어 보도하는 기자등의 무례함과 고압적인 자세는 사건이 보도되는 순간 일단 기본으로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편향된 기사들은 더 또 어떠한가. 사건 당시 내가 직접 인터뷰한 곳은 kbs 유일했으나, 각 언론은 수많은 복붙기사와 추측성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피해 사실을 입증하라 요구하는 기사들, 순수하지 않은 피해자로 이미지를 바꾸는 각종 스캔들 같은 기사들(회사생활 이력부터 개인적 사생활까지 줄줄이 엮어대는 기사들)은 말 그대로 한 사람을 탈탈 털어대는 꼴이었다. 그 정도 털어서 먼지하나 안 나올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약자의 입장에서 개별 언론을 대응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평범한 시민들은 언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고 그렇다고 재벌 홍보팀이나 연예 기획사처럼 대변해 줄 전문가도 없다.

혹자는 지금도 ’나를 향해, 너에 대하여 알고 있는 그 불순한 기사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네가 적극 소명했어야지, 왜 언론 탓 혹은 그걸 믿는 사람을 탓하느냐’는 식으로 되물어 온다. 일단 우리나라의 넘쳐나는 언론 매체의 수를 살펴보고 해야 할 말이다. 개인이 각 언론별 대응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 어디 잘못된 이야기라고 해서 진위를 따진다고 그 기사를 수정하고 쉽게 정정하기라도 할 것 같은가,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 제대로 된 취재 없이 그런 기사도 써대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언론중재위에 제소하는 제도적 방편이 있지 않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한창 사건을 다투고 있는 개인이 이런 일까지 해결해 낸다는 것은 과히 초인이 되어야만 가능할 정도로 돈도 시간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여유가 없다.

한번 오염된 뉴스가 나가고 나면 그 뉴스는 이후 수정이 된 다고해도 여전히 잘못된 첫 번째 보도의 파급의 영향 아래에만 놓여있게 된다. 결국 가짜 혹은 허위 뉴스가 여전히 사실로 인정 되니 언론 피해자의 ‘피해의 몫’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요사이 엄혹한 검찰 발 수색과 영장청구가 넘치는 과정과 특히 대장동 관련 보도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언론 환경과 언론 보도 행태가 고스라니 드러나는 듯해 참 절망적이다. 시민이 바른 생각으로 판단하기에는 나쁜 혹은 잘못된 뉴스들이 너무 많다.

언론은 막강한 권력집단이다. 그 힘의 크기는 약자에게 더 관대하고 강자에게 더 철저해야 한다. 설사 좋은 언론환경이라 하더라도 다수 약자의 입장에서는 부당한 혐의가 씌워진 사건 속에서 무분별한 언론보도라는 험난한 과정을 헤쳐나 가기는 힘들다.

보도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언론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언론의 교묘한 각색에 시민 다수의 눈이 멀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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