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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증명해야하는 약자의 고통과 언론

죽음으로 증명해야하는 약자의 고통과 언론

얼마 전 폭압적인 정부의 노조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한 노동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부패하고 비도덕적인 노동자들의 방조와 노조 활동의 위선으로 각색하려는 언론의 획책이 있었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결코 나에게만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경험해야 할 큰 고통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삶의 궤적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듯이 나에게도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감당 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압박과 고통의 시간이 찾아온 적이 있다. 성실한 시민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면 나의 삶은 크게 흔들림이 없을 줄 알았던 순진함은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땅콩 회항이 이라는 희대의 사건으로 인해 두 번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 중 한번은 회사로부터 또 공권력과 언론으로부터 받는 압박(강압적인 수사 방식과 과도한 언론의 취재 및 일방적인 보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회사에 업무를 복귀한 이후 겪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목적지로 비행하고 있던 비행기 안에서 이었다.

회사와 대립 관계에 놓인 상태가 되니, 누군가는 나서서 밀정이 되어 나의 일거수일투를 보고하고 흘렸고, 또 누군가는 스스로 완장을 찬 감찰 반장을 노릇을 하며, 회사를 대표하는 이익 주체인 것처럼 나서기도 하며 행하는 모욕주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공황장애와 불면증 증세도 심하던 상태에서 감정적인 모욕감이 겹치다 보니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아주 드물게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공간이 화장실이다. 어깨 높이 보다 낮은 손잡이에 유니폼 넥타이를 걸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누가 자신의 삶을 쉬이 자신의 손으로 단절하려고 하겠는가. 특히 다수의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극단적인 선택의 배경에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이상한을 극복할 방도가 없다는 절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코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동조하거나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많은 약자들의 삶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약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죽음으로 증명해야하는 공동체는 결코 건강하지 못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그 누구의 삶도 안전하지 못하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어느 순간 그 사회가 규정한 한계선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절망적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적 사회이고 개인의 희생이 언제나 쉽게 용인되는 사회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회의 정의 실현과 좋은 방향성으로 이끌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언론이 고 양희동 열사의 죽음의 배경에 있는 약자의 고통은 외면한 채 정당한 노조활동을 '공갈 협박범'으로 매도하고, 고인의 유서 대필 의혹을 사실처럼 보도하며, 죽음마저 기획, 조작하는 부패한 집단으로 매도하려한 일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가진 권력은 힘은 막강하다. 이 막강한 힘이 또 다른 권력에 아부하거나, 그 권력을 더 강화시켜주는 데에 쓰이기보다는 다수의 삶을 바꾸기 위한 일에 쓰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일들에 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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