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인권과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겪는 여러 문제 즉 노동권은 서로 맞 닿아있는 사회적 미결의 과제들이라 생각한다. 대체로의 인권 수준이 높은 국가에서 노동권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그 권리가 적용되고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때 그 사회가 가하는 징벌의 무게도 더 크게 적용되는 듯하다. 그 예가 아직까지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산재나 노동자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나라의 사법 체계와 판결에서 들어난다. 그러니 직장 내 괴롭힘이나 산재로 노동자가 죽어도 그 책임을 제대로 지고 형벌을 받는 사람조차 없거나 그 피해에 대한 보상 수준도 미미하다. 사람과 노동자를 다른 존재로 대하는 사회적 인식 문화가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노동자를 자본의 종속물이나 자본보다 하등한 소모품쯤으로 여겨온 오래된 경제 성장 우선주의 사회 문화가 만들어낸 가치관이 아닐까.
‘땅콩회항’이라는 사건 이후 자각한 시민으로서 사회 참여 활동을 정치적 활동과 여러 노동, 인권 단체들과의 연대활동으로 이어나가며 소위 말하는 강연이라는 것을 자주 한다. 대체로의 강연 후기는 여러모로 나 자신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주고 또 참석자들에게도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해준 듯하여 많은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유독 여전히 견고한 벽처럼 느껴지는 강연 후 현장 질의응답 유형중 하나가 있다. 바로 그 질문은 ‘소위 부당함에 대한 내부 고발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면 지금보다 안정적인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면에서 여러모로 나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면에서 그 저항을 후회하지 않느냐’이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항상 똑 같다. 그 답은 이 글의 끝에 여러분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한다.
땅콩회항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도 이제 8년이 되어간다. 그 사건 이후 6년간 회사를 더 다니며 여러 소송을 직접 다루고, 직장 내부의 개혁을 위한 투쟁도 이어 나갔다. 아마도 그런 행보가 여태까지 우리 사회에서 보지 못했던 일들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 사건과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본 이윤 추구의 수단인 회사라는 조직안에서 저항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이상의 고통을 개인에게 겪게 만든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혈연 관계로 이어어진 세습 자본가들이 모든 권한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재벌 대기업 안에서 그런 저항자가 된다는 것은 매일 매일 날카로운 칼 끝 위를 걸어 나가야 하는 수준이다.
나도 회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기를 든 자‘가 된 순간 인사 규정을 이용한 불이익 조장과 조직에 의한 차별과 혐오,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 사람들이 늘 존재했다. 바로 오래동안 친근한 얼굴로 나름의 동료애를 느껴왔던 바로 직장 동료들말이다. 어떤 심리관련 책에서 읽었던 글처럼 오랜 마음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가족과 어린시절 친구와 같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여러 폭력들이다.
땅콩회항이후 줄곧 사무장 즉 팀장의 지위를 박탈 당하고 매 비행에서 한참 연배도 근무 기간도 차이나는 동료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을 해야 했다. 이런방식의 조직 체계에 의한 차별이나 불편함을 넘어 개인적 모욕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극한의 일들이 자행되는 어느 비행이 있었다. 회사에 아주 충실했던 한 후배가 팀장으로 가는 비행이었다. 승무원의 업무 특성상 승객들의 식사가 끝난이후에서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승무원들도 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 날 내가 근무하던 구역의 관리자로 있던 십수년 후배 승무원은 나를 혼자 남아 제일 마지막에 식사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 다른 동료들이 식사를 다 마치는 동안 화장실 청소를 맡겨서 그 일을 하고 내 순서가 되어 천으로 덮여있는 식판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
비빔밥 그릇에 국이며 반찬 그리고 디저트 케익까지 전부 부어져 있는 거였다.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기보다 불현 듯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존엄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비행기에서도 자살을 하는 사람이 있다. 가만히 비행기에서 자살을 한다라고 생각해보면 마땅히 그런 일을 할 장소가 있을까 싶을 수 있다. 일반적 지상 공간보다 사람간의 거리와 밀집도가 높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일하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 화장실 안이다. 그 안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방법에도 두가지의 방식이 있다. 아마도 신체적 자해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식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질식이라는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비행기 화장실은 환경적 요건으로도 적합하지 않다. 마땅히 높이나 여유 공간의 넓이가 그러하다. 그래도 겨우 어깨 높이 정도의 위치에 어떤 도구를 통해 그 안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죽고 싶다는 욕구가 더 크기 때문에 스스로 최후의 순간까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매고 있던 유니폼 넥타이로 나도 스스로 살겠다는 저항을 포기하고 그 공간에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 화장실 벽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순간 처참한 몰골로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왜 내가 누군가의 폭력에 의해 죽음을 선택해야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이 모든 일에 나의 잘못은 없었다. 이렇게 피해자인 잘못을 하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죽음이나 죽을 만큼 힘든 고통으로 내몰리는 세상은 잘못 된 것이다.
땅콩회항 이후 여러 사회적 부딪힘과 힘듫이 있었지만, 나라는 사람이 현재와 같이 사회 변화 적극 참여자로 나서는 과정의 길에 여러 일들과 계기가 있었지만 그 중에 다시 ‘나’라는 한 개인의 문제를 떠나 세상을 향해 변화를 요구하는 행보로 더 크게 나서게 해준 사건이 바로 그날의 일이었다.
각개인 권리의 가치보다 겉으로 안정적으로 비춰지는 것들에 조차 고개 숙이는 부당한 복종이 더 나은 것이라 물어오는 이들에게 하는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 사회 존재하는 다양한 부당함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절대 잘못이 없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잘못을 자행하거나 잘못된 쪽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이런 저항자들이 더 보호받고 우대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권리가 존중받는 더 나은 선례가 되려고 항상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