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말에 산 길을 앞장서 걷던 민우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혜민을 바라보았답니다. 그는 잠시 그때를 기억하다 미소를 짓고 말을 이어갔죠.
"하하! 혜민아! 사실, 그 당시 고민이란 게 별거 있었나? 연애, 진로, 친구 문제. 이런 거였지. 그런데 중요한 건, 나는 친구들 고민을 들어주기만 했어."
"듣기만 했다고? 그런데 어떻게 다들 고민을 해결했을까?"
"누구든 상대방 얘기를 잘 들어주기만 해도, 그는 고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자기가 말하면서 자기가 결론을 내지. 나는 그저, 공감해주고, 적절히 호응해준 것 밖에 없었어. 나에게 있는 장점 하나는, 다른 사람 얘기에 공감을 잘한다는 거야. 얘기를 들으면 내가 꼭 당사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거든."
민우는 자신이 한 게 별로 없다는 듯 얘기했지만, 혜민은 그런 민우가 특별하다고 생각됐답니다.
사람들은 얘기를 듣기보다 하기를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도, 그녀가 하나를 얘기하면, 듣던 친구는 둘, 셋을 얘기하며 자기 고민이 더 크다고, 그녀 말을 자르기 일쑤였지요. 결국 나중엔, 누구에게도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혜민은 민우에게 라면, 자기 고민을 얘기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이 친구! 무슨 말 못 할 고민 있어? 나는 지금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언제든, 옛날처럼 말이야!"
주차장에서 망해사 입구까지, 아주 가깝습니다. 절 입구에는 주차장이 없습니다.
둘은 다시 산길을 걸어 목적지인 망해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위로 더 올라가면 전망대가,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망해사이지요. 하지만, 아직 바다는 보이지 않습니다.
민우는 벌써 오래전에, 이곳을 글에서 봤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진 한 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지요.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인 범종각은 그의 맘을 설레게 했답니다. 그래서 꼭 여기에 와보고 싶었지요.
오랜만에 동문회에서 만난, 동창생 혜민이 같이 길을 나선건, 아마도 그녀 나름 목적이 있었나 봅니다.
'여기서 정말 바다가 보이기는 하는 걸까?'
민우는 산길을 오르면서 정말 바다가 보일까? 걱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망해사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죠.
하지만, 과장되게 말해서, 열 걸음 정도 아래로 내려가니,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답니다. 거대한 물줄기가 보였기 때문이요.
"와! 여기 멋진데!"
그저 민우 말만 믿고 따라온, 혜민이 감탄사를 남발했습니다. 그녀의 굳었던 얼굴도 밝게 펴졌지요.
"근데, 저기가 바다야? 강이야?"
이곳은 만경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곳입니다. 원래는 바닷물이었을 텐데, 지금은 호수 같으니 이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죠?
망해사는 꽤 오래된 절입니다. 무려,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요. 부설거사가 이곳에 절을 지은 것이 시초이고, 그 후 당나라 승려가 중창하였지만, 그 당시 지진이라도 났던 걸까요? 안내문에 따르면,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겼다고 적혀있으니 말이죠.
그만큼 이곳 망해사 앞바다는 물이 깊었습니다.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 덕(?)에 잔잔한 호수가 돼버렸지만,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밀물 때는 절 앞까지 파도가 출렁이고, 썰물 때는 갯벌이 드러나 그곳에서 뛰어놀았답니다.
1589년, 조선 선조에 이르러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세웠고, 1933년 김정희 화상이 보광전과 칠성각을 중수하였답니다. 그 뒤 낙서전은 1933년과 1977년 다시 중수했다고 전합니다.
낙서전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8호)과 팽나무
낙서전 앞에는 약 400년 된 팽나무가 있습니다. 이 팽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보호수랍니다. 고목이 주는 연륜이 이 절을 더 고즈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예전엔, 심포항에서 놀다가 이곳 망해사에 오곤 했데. 그만큼 가까웠나 봐"
"아마도, 심적 거리가 가까워서 그랬을 거야! 바로 지척에 좋은 곳도 마음에서 멀어지면 지구 반대편만큼 거리가 생기는 거니까!"
혜민은 눈에 보일 듯 말듯하게, 숨을 짧게 내쉬며, 민우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는, 지금 그녀가 얘기한 마음의 거리가 꼭 장소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녀를 못 만난 지난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녀는 그에게 오늘 무슨 얘기를 할까요? 돌아가는 길에 들어봐야겠다고 민우는 생각했습니다.
망해사
그리고, 처음엔 무심코 경내를 걷던 둘은, 순간 너무 조용한 절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스님들도 보이지 않고, 참배객도 없어 더 적막했죠. 그런데, 이런 곳에서 자신들만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로 경내에 깔린 자갈이었죠. 걸을 때마다 사각, 사각 소리가 절집에 울립니다. 아니다 싶어 조심조심 발걸음을 디뎌봅니다.
도시 소음을 여기까지 안고 왔었구나. 여기도 기도하는 도량인데, 너무 관광객 티를 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일주문이 있었다면 세상과 경계를 구분하여 조용히 절집에 들어섰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둘은 풍경에 먼저 들떴으니까요.
범종
둘은 말없이 망망대해를 꿈꾸고 있을 망해사처럼, 바다를, 혹은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제 만경평야가 줄곧 그들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만경평야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혜민이 살아온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