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 2019 개봉, 미국, 감독:토드 필립스
최근 아리 애스터 감독의 '보 이스 어프레이드'가 개봉을 했다.
2023년 기대작 중 하나인데 방학이 되어 이제 시간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때문에 나는 영화관에 가지 못하는가? 집 밖을 나가기가 두렵다.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게 맞는가 싶다가도 그간 번아웃 직전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며 일에 파묻혀 살았던 나 자신을 돌보려면 의식적으로라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연습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보게 될 '보 이스 어프레이드'의 주연인 호아킨 피닉스의 역작들을 다시 찾아보는 건 어떨까? 싶어 길고 긴 서치 끝에 어젯밤 걸려든 녀석은 바로 '조커'. 나의 지친 육신과 정신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이런 영화보다는 잔잔한 스토리에 눈이 정화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도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론 짜릿한 전율과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또한 느끼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 사이 갈등한다.
어제의 나는 짜릿함에 한 표.
개봉했을 당시 영화관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주인공 아서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그의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미친 듯이 몰아치는 살육을 놀란 마음으로 보느라 정확히는 그의 내면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 4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인데 대부분의 충격적인 장면은 내 장기기억 장치에 제대로 각인이 된 듯 중요한 포인트 장면은 새록새록 기억이 나긴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초반에 등장하는 조커가 아닌 아서의 불행한 일생이 좀 더 깊이 다가왔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행복'이란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을까?
영화에서 아서라는 인물은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의 인물로 병이 있는 노모를 모시며 살고 있는 중년 남성이다. (그 노모도 나중에 밝혀지게 되지만 어릴 적 그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해왔던 사실이 밝혀진다.) 그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일자리는 광대. 용역업체처럼 일이 들어오면 파견 나가 근무하고 돌아오는 일용직이다. 그마저도 녹록지 않고 직장에서나 일상에서나 그가 남들에게 베푸는 배려와 온정의 표현들은 도리어 멸시와 무안, 이유를 알 수 없는 경멸과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인간 본위의 존엄과 자존을 짓밟는 모든 엿같은 상황들을 꾹꾹 눌러 참아오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불행 그 자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꿈은 남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며, 남을 웃겨야 사는 광대를 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웃을 수 없는 현실 속 신경증적 발작으로 인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병증을 지니고 사는 이 모든 게 아이러니 투성인 삶이다.
그의 삶은 이렇듯 기묘하게 어울리지 않고 어딘가 비틀려 있으며 응축된 악과 광기로 가득 찬다.
기괴한 포인트에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의 웃음은 이 영화를 묘한 긴장감과 공포 속으로 밀어 넣는다.
웃음.
이 웃음이라는 게 그의 인생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진정으로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있는 순간은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뿐인 이 증세가 바로 아서의 삶을 은유하는 게 아닐까?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살인이라는 과정을 통해 점점 광기 어린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은 실로 리얼하면서도 공감이 된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조커>라는 영화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70년대 고담 시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 없는 이 쓰레기 같은 사회와 그 속에서 무심함과 편견에 의해 상처받는 수많은 불우한 가정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물론 그렇다고 광기 어린 살육의 행태와 범죄행각들이 합리화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불우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아서가 버스에서 어린아이에게 재미있는 표정으로 웃음을 안겨주었을 때 자기 아이 괴롭히지 말라고 타박을 주었던 저 아주머니와 같은 매몰찬 상처는 최소한 주지 말자는 거다.
(개인적으로 저 상황에서 마음이 가장 아팠다.)
그가 지하철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화장실로 도망쳐 각성한 그 장면. 바로 아서가 조커가 되는 중요한 장면이다. 마치 다시 태어난 듯 살인을 저지르고 난 그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화장실에서 춤을 춘다.
기괴하리만치 자유로운 춤사위. 그리고 그 이후에 그는 여러 장면에서 춤을 추는데 집 안에서 웃통을 벗고 췄던 그 춤사위는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어린시절 학대의 결과일까? 그의 일생을 고스란히 증명하듯 굽은 등과 뼈마디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한 그리고 어딘가 뒤틀린 몸으로 추는 춤.
노트르담의 꼽추가 환생한 듯한 본능적인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춤 같아 보였다.
본능을 연기하다니... 바로 이런 점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가 호평을 받으며 그 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은 거겠지 .
조커 주인공을 호아킨 피닉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이 가질 않는다.
조커를 다시보며 대단한 배우라는 것 또한 다시금 인정하게 된다.
그 유명한 계단 위 춤추는 조커 장면. 그의 일생일대 소원이었던 토크쇼 출연을 앞두고 그는 거침이 없다.
작두 탄 살인마가 이런 것일까?
이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살인마.
너희가 그토록 떠들어대는 그 사람이 바로 나야!
너희가 그렇게 추앙하는 사람이 바로 나야!
너희가 무시했던 바로 나라고!
이제 모든 것을 다 드러낼 마음으로 사회에 대한 복수와 원망을 여과 없이 드러낼 작정을 한 그의 모습은 이제 악마 그 자체다. 토크쇼를 한참 하다가 동영상을 공개해 전국적으로 망신을 줬던 머레이를 생방송 도중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리고 그 앞에서 또 춤을 춘다.
인간이 악마가 되는 것은 순간이구나 싶었다.
최근 터진 신림동 묻지마 살인 사건과 오버랩 된다. 그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악마 중 하나였을까?
광기로 가득 찬 고담 시티와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
결국 그는 다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되지만 마지막 피범벅이 된 발자국을 남기며 병원 안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무엇을 상상토록 만든 장면인 것인지,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악을 부르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악마가 된 사람들.
더 이상은 안된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사회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