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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Mar 15. 2023

”원망“ 이제 죽도록 해보려고 해.




나는 원망, 미움이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주 찰나에 가진 적이 있지만, 오래도록 품지 않았다. 내 평생 수 없는 가해자들에게도 말이다.

그러나 이젠 죽도록 ‘원망’ 해보려 한다. 내가 내 삶 속 가해자들에게 원망하지 않는 것은 그 감정은 안고 사는 동안 내가 무너지고 그 아플까 봐 또, 그 감정조차 가질 만큼 가치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은 깊은 곳에 숨겨뒀는데 이제부터 숨기지 않겠다 다짐했다.


원망 같은 건, 내 마음속 불덩이를 만드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그러지 말라고 통제했다. 그 통제가 풀린 건 ‘더 글로리’ 드라마 속 연진과 동은이가 재회한 교실 속 동은의 대사가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절망이 가득한 어떤 날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한 날이 첫 번째였다.


주님, 제 기도를 제발 들어주세요.
당신이 신이라면 한 번은 들어주세요, 복수하겠다는 말 아니에요. 제 편이 되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그들이 갈기갈기 뜯고 뜯고 부순 저의 영혼을 가엾게 여겨주세요.
당신은 내가 이런 기도를 하길 바란게 아니잖아요. 평생 그들이 속죄하면서 살게 해 달라는 기도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발.., 제발, 제 울음을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다리가 저리다 못해 감각 따위 느껴질 수 없을 만큼 간절히, 아주 간절히 울며불며 기도했다. 복수를 꿈꾼다는 말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이라면 이 원통함을 한 번은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담 언젠간 외면받지 않는 어떤 날이 한 번은 오지 않을까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기대했고 기다렸다. 그러나 잠재된 나의 원망이 터져 나온 건 통증과 수치였다. 어느 날부터 아니다, 정확히 엄마의 실종신고를 받고 찾아왔던 경찰이 다녀간 그 이후 극도의 스트레스를 품고 다녔고 작은 스침이나 소리에도 놀라 하루하루가 고됨 속에서 몸이 버티지 못해 두통과 구토를 동반한 어지럼증을 앓으면서 이명까지 찾아오는 최악의 상태를 맛봐야 했다. 처음엔 단순히 빈혈이 온 줄만 알았다. 빈혈이라고 하기엔 빈도가 가끔 그리고 통증은 짧고 굵게 왔다. 그 후엔 빈혈 말고 작년에 앓았던 돌발성 난청이 다시 찾아온 거라고 믿었다.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하다 구토를 했고 한 글자 단어 듣는 검사에서 수치상의 문제로 뇌 검사를 권유받고서야 견고했던 통제와 억눌림이 터져 본색을 드러냈다.


“만약 정말 뇌에 문제가 있다면, 있을 거라면 당신을 찢어 죽임을 당해도 할 말 없어.”


매일 밤마다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나를 이리도 아프게 한 가해자들 향한 원망의 소리가 손으로 막은 입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신경과에 간다면 당연히 나에게 검사가 떨어질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검사결과는 당연히 안신 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미룰 수 있다면 더, 아주 더 미루고 싶었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쓰레기통을 부여 안고 수시로 구토하는 모습에 고집부릴 일이 있고 아닌 게 있다고 생각했다. 내 통증에 대해 타임라인을 정리했고 이해하기 쉽게 통증의 정도를 1~10까지 숫자 중에 적당히 골라 적은 메모장을 보여주니 내 생각대로 의사는 당장 입원해 감사할 것을 명령했고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따라야 했다. 검사를 위한 입원을 기다리는 2일 동안 통증에 아파하며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찍고 쓰레기통을 안고 구토를 반복하다 응급실로 입원했다.


나에게 이틀은 너무나 길고 참 힘든 시간이면서도 사지를 갈기 찢어도 시원치 않을 가해자들에게 원망을 아낌없이 퍼붓던 거침없는 ‘나’였다. 퇴원한 후에 아팠다는 것을 알게 된 지인들은 내게 물었다. ‘힘들거나 무섭지 않았어? 혼자 뇌 MRI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거…‘


나는 대답했다. “오히려 덤덤하고 차분했어. 어떤 결과가 나에게 떨어져도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이미 사형선고였고, 이미 망가졌으니 살아갈 시간 동안 지켜내야 하는 팔자인 건 알고 있었으니까.”


10가지가 넘는 검사를 마치고 덤덤했고 이상할 만큼 차분했던 내 마음이 의사 앞에서 모든 검사 결과를 꺼내는 그 입술에 집중되었다. 막상 앉아서 결과를 들으려니 심장이 급하게 뛰어 이대로 멈춰도 문제 되지 않겠다 싶더라. 겁을 주는 것도 아닌데 한 템포씩 쉬었다 얘기해 주는 의사의 숨 텀이 맘에 들지 않는다. 뇌출혈, 뇌졸중은 없다. 지나간 흔적도 다행히 없다.


아, 그렇구나. 다행이고. 그렇게 대화가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빈맥이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60~90 정도까지 올라가거든요? 근데 환자의 심박수는 평균 수치가 96이에요, 높죠? 평소에도 심장소리 자주 들렸을 테고, 빈맥은 본인이 더 알고 있었을 거고. 일단 약 처방을 했어요. 추가로 들어간 약, 그게 그거예요.”


안다, 난 심각하면 170까지도 올라가기도 한다. 긴장하면 130은 기본으로 넘는 것도 말이다. 저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다. 어떤 뉘앙스가 적절히 섞였는데 내가 듣기엔 빈맥이 높아서 언제든 문제가 되는 질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처방된 약 먹고 심박수가 내려갔냐고? 아니다, 차도가 없는 약처럼 느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스마트워치로 보면 여전히 나는 120 넘는다.


의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자율신경계 검사 결과는.. 반 이상이 문제가 있어요. 이상소견이 보여요.” 얼굴을 그리하니 더 심각하게 느껴져 숨이 먹힐 지경이었다.


나는 조금 남들보다 아픈 횟수가 잦고 동네병원정도 가는 빈도가 좀 더 많을 뿐이지 그렇게 나쁜 건강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탕탕탕, 나에게 선고가 내려졌다고 그 판결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지우지 못할 글씨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잠정적 사형선고와 같았다. 지금 당장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분명 큰 병이나 큰 문제를 만들 원인들이 분명했고 약물이나 어떤 원인을 제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료는 없다는 게…


이게 원망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상관이 없을 이유는 또 뭐, 있겠어? 되묻고 싶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허약하고 자주 아팠는데 정도가 지나쳐 때때론 응급실에서 조치받아야 할 만큼 안 좋았다. 하지만 병원에 간 경험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게다가 늘 보호자는 곁에 없었고 오히려 나를 피해 도망 다니는 내 보호자를 찾으러 다녔었다. 어린 날의 기억에서도, 훗날 20년 만에 다시 만난 고모네 가족에게 들은 말은 “방임” 동일했다. 방임으로 생겨나 후천적 면역력 저하로 인해 15살 때 병원에서 독감이나 B형 독감은 절대 조심하라고 면역체계가 아예 없다는 소견을 들었다.


초등학생 이후엔 죽을 만큼 맞았고 죽지 않아서 수시로 죽음의 위험을 느껴야 했던 처절하고 고약한 시절을 내 몸과 마음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쁜 것은 다 더해진 그 기억으로 성인이 되어서 현재처럼 뇌 오른쪽 앞부분에 부풀어 있어 1년마다 추적관찰을 해야 했고 아주 고약한 수면제를 먹지 않는 한, 졸림도 느끼지 못한다.


피임약을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생리를 안 하는 내 몸뚱어리, 난소 물혹을 달고 다니느라 몸이 아파서 피검사를 해보면 조기폐경에 가까운 수치, 이미 16살에 난소 수술 경험이 있어 결혼을 어찌어찌해도 아이는 가질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냥 문득 난자냉동도 꽤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나 지금 이렇게 불행해!‘ 불행을 나열하고 전시하고 쓰는 글은 아니다. 내 어린 날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몸이 아픈 것과 과거의 상처 연관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렇게 글이라도 얘기하고 싶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불안도가 높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과각성 상태에 있어 상대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많고 높기에 크게 아프거나 암 같은 큰 병에 걸리기 쉽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렇게 아프고 고칠 수는 없어 평생 안고 살아갈 병명들과 위험성 그리고 지긋지긋한 병원을 계속 다니고 수많은 약을 먹는 게 관계성이 높고 원인이 된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최근에 알게 된 건데 병원에서 말하는 가족력에는 단순히 가족의 병력만 의미한다고 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살아오면서 있었던 환경과 부모와의 관계 친밀도 등 포괄적으로 의미함을 알게 됐다. 이 타이밍에서 절대 쓰고 싶지 않은 단어가 있는데 안 쓸 수는 없어서 말해보자면 “만약 내가 학대와 학폭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나는….”


관두자, 가정법을 쓴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트라우마와 몸에 나타나는 통증들이 심상치 않고 심각함이 어떤 연관이 되고 어떤 관계가 되는지 스스로가 확인받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가해자들을 원망하는 힘으로, 그 원동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건 알게 됐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조금 평범하게 그리고 잠시라도 웃으며 행복을 느낄 날이 종종 있었겠지.’ 행복할 권리를 빼앗긴 만큼, 평균의 사람들처럼 웃고 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버린 만큼 나는 죽도록 가해자들을 찢어 죽이고 싶을 거야.


혹시나 주변에 말도 안 될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상상하지 못할 상처가 있다면 말이야. 그 사람이 몸이 약하고 아픈 것에 대해 태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거나 “왜 이렇게 몸이 약해요? 괜찮아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사자는 마음이 더 쓰리지만 이게 그냥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을 거라고 애써 덤덤하게 있는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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