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셜리 Feb 07. 2023

살아있음에 고마워.

견디다, 버티다는 말 대신 건네는 위로


나는 아동학대 피해자이다. 나의 아픔을 어쩔 수 없이 꺼냈을 때 혹은 내 의지로 이야기했을 때 꼭 듣는 말이 있다. “견뎌줘서 고마워.” 아님 “버텨줘서 고마워.”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단어가 주는 이질감이 싫다. 견디다의 뜻에 사람이나 생물이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않고 라는 문장이 들어간다.


’저는 학대 피해자 입니다‘ 브런치북에서 학대피해자로 산다는 건​ 글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통에서 견디거나 버틴 적이 없다.  그냥 매일 죽고 싶어 하다가 제 멋대로 시간이 지나버려서 성인이 되었고 눈으로 보이는 학대가 사라졌을 뿐 나는 트라우마로 여전히 아프고 힘겹다.


내 글을 보았듯 시간이 흘러서 아동학대는 눈에서 사라졌고 학대받는 모든 시간 동안 학대하는 부모의 감정과 상태를 살피며 오늘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내일은 제발 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간절함과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우리 엄마가, 아빠가 날 사랑해서 하는 사랑의 표현이야! 내 부모가 날 때리고 미워할 리가 없잖아!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화내고 때리는 건, 부모님 말처럼 내가 크게 잘못해서 그래! 매일 부정하며 살아왔다. 맞아도 되는 잘못이 어디 있겠는가, 학대라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어하면서 10번의 밤 중 언젠간 딱 하루라도 나를 안아줄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을 가지고 반복하고 보니 살아서 내 학대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인이 되었다. 학대받는 동안 나는 모든 오감이 예민하게 작용했고 잠시라도 불안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모든 찰나의 순간조차 미리 예상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공포를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참 계획적이고 원칙적이며 즉흥적인 것을 혐오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아주 훗날이 지나 더 이상 나를 학대한 부모와 연결고리를 끊고 안전한 환경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서 ‘나’란 사람은 호기심이 강하고 즉흥적이며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라 계획하고 행동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버티다, 견디다 단어에는 웃기게도 상황이나 환경에 성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만 같아서, 학대가 사라졌으니 모든 게 끝이라고 하는 말 같아서 싫다. 난 그래본 적이 없고 늘 학대 앞에서 무너지고 영혼이 박살 나고 엉망이 되어 버린 채로 시간을 흘러 보냈던 나는 학대가 사라져도 몸에 남은 흔적들로 괴로운데, 보통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남들 한 번 힘들 일을 나는 100번 힘들어하는데 말이다. 학대는 사라져도 흔적은 남아 내 영혼이 기억하고 내 몸이 간직하는 이 고통의 끝은 잔상이 커서 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니 과거 완료형의 ’버텼다.‘, ‘견뎠다.“ 맞지 않는다.


학대피해자 자조모임을 가거나 집단상담을 가봐도 나처럼 버티다, 견디다를 위로로 듣는 것을 비슷한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것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해주는 위로라는 것을, 이 단어들 말고는 그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는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브런치에 견디다, 버티다는 위로를 듣기 싫어한다는 표현을 쓰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이 단어 말고 학대 피해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뭘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모르겠더라. 근데 분명 저 깊은 어딘가에 이 위로보다 강하고 묵직하게 와닿을 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다 트라우마로 울고불고 고통스러워하는 날 보며 친구가 그러더라.


“이렇게 살아있어서 고마워요, 서로의 힘듦을 이야기할 수 있고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순간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것 같았다.


학대받으면서 수시로 들어온 말이 있다. ‘너 같은 쓸모도 없고 살 가치도 없어, 죽어버려.’ 모두가 나와 똑같은 말을 듣지 않았겠지만, 내가 의지해야 할 상대가 혹은, 스스로에게 매일 하면서 되뇌어 내면화가 되어버려 당연한 말을 틀렸다고, 아니라고 알려주는 아주 크고 단단하고 묵직한 말 ”살아줘서 고마워. “ 매일 밤 죽음을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잤던 나도 어쩌다 시간을 흘러 보내고 정신 차리고 보니 피해자가 되어 있던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던 모든 순간을 눈물로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말, “살아줘서 고마워.”


강아지 학대 트라우마 관련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영상 자막에도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있었다. 강아지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게 이상할 수 있지만, 힘 없고 말도 못 하고 표현도 서툰 영유아 때부터 받아온 학대는 살아온 동안 너무 당연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그것이 내 부모가 날 보는 시선이기에 마땅히…, 아주 당연한 것처럼 느끼고 살다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게 학대라고? 부정해 온 학대 피해자들은 사실 이겨낼 힘조차 없었다. 내 부모가 내 세상의 전부였으니 애초에 나쁜 행동을 하는 부모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한참 흐르고서야 잘못됨을 인지하고 신고를 하거나, 소송을 걸거나, 의지로 심리상담 치료를 받거나 등의 바로 잡으면서는 지내는 사람들, 학대에 흔적으로 고생하고 때로는 자살도 서슴없이 생각하는 피해자들에겐 피해가 있었고 없어졌고를 떠나서 가장 크게 닿을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작년 8월 때즈음부터 고민했던 물음에 비슷한 정답 혹은 얼추 정답 같은 오답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힘내.“ 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처럼 앞으로 정말 더 많은 시간 동안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말들이 더 알게 되길 바랄 뿐이다. 말이 그게 그거 아니겠어? 그 말이 그 말이지! 뭘 그렇게 생각하고 아니다, 맞다를 따지냐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말이 주는 힘을 알고 믿고 있다. 작은 부정어가 한 사람의 인생에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고 넓다. 그걸 아주 미세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말로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다. 살아낸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생존자들에게, 학대, 폭력 피해자들에게 “모든 힘들었던 시간 동안 살아줘서 고마워.”, “당신이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말은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움을 먹고 자라는 어른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