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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Jan 02. 2023

그리움을 먹고 자라는 어른아이

때는 2022년 11월 29일 오전 11시에 울린 전화 한 통이었다.


“네, 여보세요?” 그 짤막한 인사 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목소리 속에 덤덤한 안내멘트가 들렸다. OOO님의 자녀분 맞으시죠? 여기는 국민연금입니다.


요약하면 아빠가 평생을 낸 국민연금을 내가 유족연금으로 받게 되었으니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추가적인 질문을 들었는데 아빠에게 사실혼 관계의 사람이 있는지 이복오빠의 나이에 대해 물어보신 후, 만 25세가 넘었으니 대상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셨다. 만 25세? 지금 내 나이 아닌가?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제가 지금 만 25세인데, 수령 대상자라고요?”

“아~ 네, 아버님이 돌아가신 당시에 나이가 만 24세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아빠의 사망신고 당시에 내 나이가 만 24세였다. 배우자나 사실혼 관계의 상대가 있으면 1순위이지만, 아빠 옆엔 아무도 없었기에 2순위인 자녀가 대상이 되는데 자녀 나이가 만 24세 이하여야 가능하다는 조건에 해당되어 나만 전액 모두 수령가능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슬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것도 와닿지 않았고 어떤 말로도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 통화를 털어놨을 때, 잘 된 일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때 내 마음은 “글쎄…, 잘 된 것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안 좋은 일도 아닌 것만 같은데….” 혼란의 연속이었다.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무의식 중에 애쓴 것 같다. 그 무의식이 깨지게 된 건 필요서류 중에 사체검안서가 있었는데 그걸 발급받고 특별한 내용 없이 깔끔한 서류 속 내용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연고자를 찾고나 등기를 보낸 구청을 통해 들었기에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관련 서류는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사체검안서라는 문서를 보는 순간, 무너졌다. 특이사항 없이 깔끔한 문서였어도 아빠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모습과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받을 유족연금을 가지고 아빠가 별이 되기 5초 전으로 돌아가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다면 받게 될 유족연금과 내가 평생 벌게 될 돈을 지불해서라도 시간을 돌리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다. 죽음이라는 큰 이별은 참 이상한 일이라고 느꼈다. 만난 적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 감정으로 하루를 견디게 하기도 하고 때론 무너지게도 하는 게… 내가 그리도 무너지고 아파하며 버스에서, 길에서 울고 있을 때 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연락을 줬는데 죽음으로 이별을 경험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반응이 정말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왜 슬픈 일이냐고 되묻는 사람, 돈이 생겨서 잘 된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나 큰 슬픔이라고 공감하고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 날은 파출소에서 변사사건사실확인서를 받았다. 그 안에는 경찰이 아빠를 발견했을 당시에 대한 상황과 사실에 대한 서술된 내용이 있었다. ’반듯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있었다.‘ 서류를 끌어안고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고 또 참으며 애써 덤덤하게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모든 서류를 챙기고 국민연금공단에 방문해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와 힘 없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울음을 꾹 눌렀다. 내가 낸 서류가 다 접수되면 이젠 더 이상 내가 살아갈 시간들 속에 엄마가 없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아빠의 유족연금과 엄마가 무슨 상관이냐 이해되지 않겠지만, 나는 살아오는 동안 엄마에게 정신적 지지와 안정감을 얻고 싶었고 내가 원할 때마다 도움을 받고 싶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상호작용도 해보고 싶었으나, 그건 나의 과욕이었었다. 그런 엄마와 달리 아빠는 세상을 떠나고 나에게 용기를 주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아빠에게 떳떳하고 씩씩한 딸이고 싶어 흔들리는 감정 속에서 휘둘리지 않기 위해 심리상담을 진행했고 약도 어느 때보다 잘 챙겨 먹었다. 무너지고 울음이 터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마다 아빠에게 편지를 쓰며 그것으로 내 마음을 위로했다. 내가 힘들어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아빠’였다. 무연고자로 시신 인수를 포기한 시간에 울면서 나를 원망하고 후회로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장례가 치러지길 기다린 시간을 잊지 않으며 꼭 4년 안에는 아빠의 유골함을 인수받겠다는 결심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아빠를 모르지만, ’나를 사랑했던 아빠‘가 있었다는 이유로 내게 큰 위안이었으니까.  그렇게 내 마음속 크게 자리 잡은 아빠 덕분에 지금의 난 많은 것이 좋아지고 달려졌다.


한 달에 한 번, 외출이나 할까 했던 내가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외출하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평생 친구가 없을 거라고 장담했던 내 삶 속에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도움 청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고 내가 좋아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엽서로 제작해 플리마켓에서 판매도 했다. 밥도 매끼 챙겨 먹으려 노력하면서 사람들과 섞여 보통의 삶이 궁금해 심리학부터 뇌과학, 소설 등 다양한 도서를 읽으며 궁금증과 부족함을 채웠다. 집단상담도 해봤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왕복 2시간 거리의 상담소도 다니며 상담도 했다. 그런 나를 본 상담사는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 애씀을 칭찬하거나 반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냥, 그냥, 저의 애쓰는 마음을 지켜봐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약이 줄었고 이제는 수면제와 필요시 복용할 자낙스 0.5mg 말고는 더 이상 약을 먹지 않는다. 감히 상상해보지 못한 장족의 발전이다.


처음엔 아빠가 남긴 유족연금을 받을 때만 해도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누구보다 간절히 아빠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인데 이 단어가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하필 유족연금을 받게 된 사람이 ‘나’였고, 하필 아빠가 발견된 시기가 내 나이 만 24세였다. 그게 나의 눈물버튼이었다. 시기적인 것도, 현재 누구보다 가장 아빠를 생각하는 사람이 ‘나’인데,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이다. 그래서 그 돈을 쓸 수 없었다.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받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미 돌아가신 아빠가 돈을 안 받는다고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히 나를 위해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가 진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날 달래야 이 슬픔의 구렁이에서, 말도 안 되는 상상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 아빠를 모시고 싶어도 돈이 없어 매일 밤을 후회와 슬픔 그리고 미안함으로 찢기는 마음으로 살면서 전전긍긍했던 과거와 지금 현재를 생각했다. 내 생일에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못했던 지난날, 힘들고 지칠 때 아빠의 유골을 볼 수 없었던 날들, 평생 주지 못 했던 꽃을 이제는 못했던 것과 합체 더 해주겠다고 했던 다짐이 이루는데 쓰자고 그리 결심했다. 무연고자 중에 봉안된 유골은 5년 동안 봉안되는데 1년에 딱 한 번만 개방해 볼 수 있다. 그 5년을 영원히로 바꾸는데 쓰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점차 진정되었다. 이렇게 보니 내 입장에선 경제적 지원도 받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정신적 지주로 남았던 아빠를 생각하면 당연히 엄마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는데 아빠의 이름으로 된 돈을 받고 보니 엄마와 아빠의 차이가 분명했고 이젠 내가 사는 세상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의 방향이 엄마와 완전히 다르게 가고 있다고 느껴지면서 이젠 엄마는 나의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이름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형태가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아, 그 사람과 나는 딱 거기까지. 나에게 길에서 욕을 퍼붓고 모욕을 주던 그 봄날이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사는 동안 나에게 고통을 주고 “미친년”, “개 같은 년”이라 부르며 정신적 아픔을 남겼다. 아빠는 돌아가신 후, 나에게 ‘너는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사랑받게 될 사람’ 알려주고 고모와 오빠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내가 사랑받을 수 있게 디딤돌이 되어 주셨다. 그 디딤돌을 통해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알게 되고 내 가치가 얼마나 무한으로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들 속에서 따뜻한 세상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젠 엄마와 다른 세상을 살겠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젠 마냥 혼자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슬픔을 나눌 수 있다. 아빠의 이름으로 남겨진 유족연금을 잘 가지고 있다가 유골을 인수받아 수목장 할 수 있다. 생일 때, 어버이날, 사망일자로 되어 있는 그날 등 보고 싶을 때 보다가, 쉬다가 내 삶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위안받고 그리울 땐 잔뜩 그리워하기로.


만약, 아주 만약에 말이다. 내가 유골을 인수받아서 수목장을 했는데 그 후에 터를 이전해야 하거나 등의 아빠를 만나지 못하게 될 일이 생기면 그때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고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흘러가면 흘러가게 둘 생각이다. 나는 딸로서 하고 싶었던 도리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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