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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Nov 05. 2022

피하고 싶은 만남

잭 호이어의 증언 4

"ISPO라는 독일 뮌헨에서 개최되는 유럽 스포츠 상품과 패션 페어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 회사의 부스가 스킨 다이빙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들 옆에 위치하게 되었다. 대부분 미국 회사들이었다. 1979년 그들과 대화 중에 스킨 다이빙 제품을 판매하면서 뉴욕의 수입업자들이 수입한 프라이빗 라벨 시계들을 판매하고 있었는 데 방수 기능이 형편없어서 고객들로부터 불만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쿼츠 무브먼트로 롤렉스 스타일의 튼튼한 다이버 워치들로 그 시장에 한 번 들어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한다면 기계식 무브먼트에서는 피할 수 없는 크라운을 자주 사용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놀랍게도 우리가 새롭게 출시한 다이버 시계들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이 다이버 워치가 1982년 피아제에게 인수된 후 호이어를 회생시키고 흑자로 전환시킨 시계가 되었다. 또한 그 후 1000 시리즈 등 태그 호이어 스포츠 시계들의 모태가 되었다.


1982년 호이어 카탈로그


이듬해에 다이버 워치를 4개의 사이즈로 확대했다. 2개는 여성용으로 2개의 큰 시계는 남성용으로 만들었다. 잠수복의 팔목에 착용할 수 있도록 스틸 브라슬렛 모델도 추가했다. 4가지 모델 모두 회전 베젤과 야광 다이얼을 설치했다."


호이어는 1982년 피아제로 인수된 후 잭 호이어가 개발한 쿼츠 다이버 시계의 판매가 증가하면서 그 해 연말부터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 잭 호이어가 회사에서 쫓겨나 베른의 다락방 사무실에서 새 출발을 하기 전에 'Heuer S.A.'에 남긴 유산이었다. 다이버 시계의 개발이 몇 년만 빨랐어도 호이어의 파산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잭 호이어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에 롤렉스와 오메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된 다이버 시계들이 20년 후 쿼츠 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70년대말부터 스포츠 시계의 붐을 예고하고 있었다.


1983년 이후 잭 호이어는 독일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어 1982년 마케팅 고문으로 첫 인연을 맺었던 홍콩의 IDT라는 디지털 체온계와 온도계를 만드는 회사의 유럽 에이전트이자 대표자로 근무하게 된다.


아크람과 만수르 오제흐


"1982년 6월 호이어를 떠난 후 나는 새로운 직업을 찾기에 바빠서 회사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후임 사장이었던 윌리 모니에르가 미지급된 급여를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따르면 내가 마지막에 개발했던 다이버 시계들의 판매가 계속 증가하면서 회사가 그해 말에 적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그 후 신문에서 종종 호이어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1986년 1월 1일 사우디의 재벌이었던 TAG에 인수되어 공식적으로 TAG Heuer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TAG 그룹은 시리아 태생으로 사우디의 사업가였던 당시 66세의 아크람 오제흐(1918-1991)가 주인이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 만수르(1952~2021)는 1985년 당시 33살이었고, TAG의 사장으로 포뮬러 원 레이싱에 거금을 투자하여 맥밀런과 포르셰의 파트너가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아크람 오제흐는 무기 거래로 재산을 모았는 데, 위험부담이 적은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레노블의 반도체 회사와 미국의 시멘트 제조 공장, 메르디안 호텔 체인 등에 투자했다고 한다.


가장 궁금한 내용은 피아제가 TAG에 Heuer를 매각한 가격이었다. 1982년 당시 200만 스위스 프랑을 투자했던 피아제는 1985년 1,200만 스위스 프랑에 매각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3년 만에 6배의 이익을 남기고 매각한 것이다.


나는 그 이후 몇 년간 바젤 페어에 참석했지만 TAG Heuer의 부스는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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