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 입구로 향하던 중, 짧고 어두운 터널 속을 걸어가는데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오르페우스와, 그의 아내였던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크나큰 슬픔에 잠긴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신 하데스를 찾아가 아내를 살려달라고 호소하며, 리라를 반주로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노래했다. 이에 감동한 하데스는, 에우리디케가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며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두 사람 모두 지하세계를 벗어나 지상의 땅을 밟기 전까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
기쁨에 찬 오르페우스가 앞장을서고, 에우리디케가 뒤따라오며 지상 세계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 나갔다. 오르페우스는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그는 지상의 땅을 밟자마자 뒤돌아보았는데, 그때 에우리디케는 미처 지하세계의 출구를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에우리디케는 곧바로 다시 지하세계로 떨어져 내려갔다.
백범광장 생태터널 (출처: 다음블로그 강바람의 지우지 못한 발자취)
오래전 읽은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자, 단짝을 앞질러 가던 나는 터널을 빠져나와 출구에서 몇 미터 더 걸어 나갈 때까지 단짝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걸음이 빠른 나는 평소 단짝과 함께 걸을 때면
늘 저만치 앞질러 가다가 중간중간 멈춰 서서
잘 따라오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터널을 지날 때는 내가 뒤돌아보면
갑자기 단짝이 사라지거나, 휙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정말 앞만 보고 열심히 걸었던 것 같다.
출구를 빠져나가고 한참 뒤에야 단짝을 뒤돌아봤다. 왜 그렇게 빨리 걸어가냐고 묻는 단짝에게 오르페우스 이야기와 터널 속에서 든 생각을 들려줬다. 참 엉뚱하다며,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떠올랐냐고 물으며 웃는다.
사실 나도 신기하다. 정말 오래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터널이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잇는 통로같이 느껴져서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생각난 걸까? 우리 뇌의 저장장치와 불러오기 기능의 작동 원리는정말 신비롭다. 죽기 전에 뇌 탐험을 할 수 있는 날이 꼭 오면 좋겠다.
어쨌거나 긍정적인 사실은,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것도 떠올리는 걸 보니 일단 많이 읽고 배워야겠는 생각이 든다. 어떤 자극에 의해 특정 기억이 떠오르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읽어두면 이렇게 웃음을 주는 몽상을 또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