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하러 지난봄에 경주에 다녀온 이후 두어 달밖에 안 지났는데 몸이 또 근질근질했다. 역마살로 인해 주기적으로 한 번씩 거주지를 이탈해줘야 한다. 올해 해외여행을 계획했으나 코로나19 유행이 꺾이자 폭발한 수요로 비행기표 값이 연초 대비 2~3배까지 뛰었다. 거기에 숙박 및 환율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 해외여행 계획을 잠정 보류하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 작년 가을에 방문했던 순천 선암사가 떠올랐다.
어릴 적 절에 많이 다녀본 나는 사찰 특유의 고요함을 무척 좋아한다. 지난가을 단풍으로 물든 선암사에서 1박 2일 간 첫 템플스테이를 경험한 후 이곳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선암사는 하루만 머무르기엔 너무 아쉬울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선암사 승선교, 2021년 가을
여름산사의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번엔 3박 4일간 머무르며 조금 더 여유롭게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충분한 힐링의 시간을 갖고자 순천으로 향했다.
폭염을 뚫고 도착한 선암사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선암사로 올라가는 길에 들어서자 시원한 그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산책로 옆길로 흐르는 계곡물소리는 청량했고, 울창한 숲은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보호해줬다.
가을 낙엽으로 뒤덮였던 길을 여름에 다시 걸어보니 굉장히 색달랐다. 지난 템플스테이 때 선암사는 계절마다 색다른 절경이 펼쳐진다고 들었는데
여름의 선암사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출발 전 비 소식이 줄곧 있어서 걱정했던 것과 달리
머무는 동안 대부분 날씨가 화창했다. 셋째 날에만 반나절 정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길래 우산을 쓰고빗소리를 들으며 산사 한 바퀴를 천천히 걸어보었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대웅전 앞 처마 밑에 잠시 서서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비 내리는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말 운치 있고평온했다. 그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바다보다 산과 계곡을 좋아한다. 결혼 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등산을 즐겼던 엄마와, 그런 엄마와 결혼해서 산행에 끌려다니다가 산을 좋아하게 된 아빠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산과 계곡을 정말 많이 다녔다. 여름철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아빠가 잡은 피라미로 매운탕 수제비를 끓여 주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한 외가 친척들 대부분이 불교신자여서 절이 꽤 익숙하다. 속세로부터 단절되어 조용하고 엄숙하며 평온한 그 분위기가 좋다. 때문에 수려한 조계산 자락에 위치하고, 맑은 계곡이 흐르며,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선암사는 내게 더없이 완벽한 힐링 스폿이다.
이번 템플스테이에서는 지난가을에 방문했을 때 하지 못했던 두 가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전통야생차 체험관에서 다례와 다식을 체험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계곡 물에 발을 담그며 승선교의 경치를 조금 더 가까이서 즐긴 것이다.
선암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야생차 체험관은 순천시에서 선암사 부지 일부를 빌려 한옥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작년엔 야생차 체험관 안내 팻말을 보고도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가 이번엔 차 마시러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렀는데, 안 갔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고즈넉한 한옥에서 미숫가루와 꿀을 섞어 만든 다식을 곁들여 녹차를 마시면서 보는 바깥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조계산이 새빨갛고 샛노란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이나,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에 와도 멋질 것 같다.
차를 마신 후 숙소인 심검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승선교 아래로 내려가 얼음물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혔다. 흐르는 물소리는 ASMR 그 자체였다. 여유로움이 주는 행복에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휴대폰 스피커로 작게 음악을 틀고 흥얼거렸다. 정말이지, 발길 닿는 모든 곳과 모든 순간이 힐링이었다.
선암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는데, 바로 편백나무숲이다. 산사에서 약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이곳에서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들이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눈이 편안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숲 속에 쉼터와 흔들의자도 배치되어 있어 편히 머무르다 갈 수 있다. 다만 여름철엔 날파리가 좀 많다.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면 파리가 얼굴 쪽으로 날아드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템플스테이 체험객들 안내를 담당하시는 등명 스님은 우리가 휴식형 템플스테이 취지에 맞게 한량처럼(?) 다니는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스님께도 그렇게 보였으니 3박 4일간 먹고 자고 놀고 쉬며 잔뜩 여유 부리고 오자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
참고로 선암사는 공양시간이 기다려질 만큼 절밥이 정말 맛있다. 참고로 나는 초딩 입맛에 가까우며, 나물류와 야채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오기 전 걱정이 많았지만 저번 방문 때도 이번에도 정말 잘 먹고 왔다. 4일 내내 끼니 걱정 없이 제때 맛있는 식사까지 제공되니 거의 신선놀음이다.
1박 2일 방문 때와 달리 이번엔 3박 4일이나 머물러서 일정을 너무 길게 잡았나 싶었는데 역시나 기우였다. 마지막 밤부터 퇴실 때까지 떠나기 아쉽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여름과 가을의 선암사를 경험했으니 다음번엔 겹벚꽃이 피는 봄에 다시 와봐야겠다. 그때까지 잠시만 안녕. 매우 순하고 귀여운 선암사 고양이 나비도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