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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pr 25. 2023

우리는 모두 데스크가 필요하다

언론은 데스크가 필요하다

글의 흐름이 매끄럽지가 않잖아.

이 통계 자료는 이렇게 쓰면 부각이 되겠어?

취재가 모자란 것 같은데?


요즈음 글이 뜸했다. 언론사 인턴 기자를 하며 하루종일 수많은 텍스트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라 변명한다. 일을 하며 깨닫게 된 것 중 한 가지는 언론사는 데스크를 둔다는 것이다. 대개의 언론은 기자의 책상을 따로 두지 않는다. 대신 데스크라고 해서 기자들이 발로 뛰어 가져온 정보들, 그를 조합해 작성한 기사들에 대한 판단과 최종적 결정을 내리는 컨트롤 타워를 둔다. 데스크란 명칭도 아마 책상을 하나 두고 내근하는 기자를 칭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기자는 자신의 기사를 온전히 창작해내는 존재지만 데스크에 따라 온전함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내 회사 생활의 데스크는 지난 2개월 간 원로 팀장님이었다. 기자로서 일해온 시간이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도 긴, 자그마치 32년. 한평생을 기자로 살아온 분이다. 지금은 인사 개편으로 부서가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출근 전에도, 퇴근 후에도 사무실을 지키던 지난 2개월 간의 데스크를 잊을 수 없다.


우리 팀은 한 달여간 취재해 긴 호흡의 기획 기사를 쓰는 팀이었다. 기사를 쓰기 전 주제의 좋고 나쁨부터 취재의 방향성, 취재원의 선별까지 팀장님의 손길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늙은 골든리버 같이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정감있고 무해하지만 유능하고 섬세한 데스크를 경험했다. 회사에 출근하면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 삭막한 분위기를 깨는 건 항상 팀장님이었고 담소나 나누자며 근무시간에 멋드러진 찻집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참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옆의 빈 자리를 보면 마음 한켠이 아려옴을 벗어나기란 여간 쉽지 않다.


우리는 모두 데스크가 필요한 거죠

마음을 아리게 하는 빈 자리는 비단 회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알아온 존재의 부재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곁에 머물며 내 가치의 데스크가 되었던 이들을 떠나 보내고 남은 빈 자리에 쌓여가는 먼지를 털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재작년 8월이었다. 외할머니가 붕어하셨다. 슬픔에 스러져 가는 어머니를 안았다. 무너져서는 안됐다. 당시 나는 군인으로 복무하며 부대에서 왕따를 당하고 기저질환이었던 우울과 불안이 극대화되어 국군 수도 병원 입원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은 내가 가장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고 최대한 어른이고 싶었다. 아니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수도 없이 마시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부조금을 받고 음식을 날랐다.


하지만 상주의 방을 꼬옥 닫지 않는다는 등 의식하지 못한 부분에서 실수들이 터져나왔다. 나는 잠시 자리를 벗어나 로비의 소파에 몸을 뉘였다. 그러다 문득, 눈물이 참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내 마음 속 데스크를 상실해있다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현재 할머니의 부재에 슬퍼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던 것이다. 당최 어떻게 할 지 모르고 밖으로 나가 벽에 기대어 하염없이 오열했다. 가장 크게 드는 생각은 죄송스럽게도 나의 데스크가 사라졌다는 사실. 군인이 되고 단절된 친구들이 나의 데스크였다.


어리석은 일을 해도 괜찮다며 어깨를 토닥이고 때로는 따끔하게 지적도 하는 이가 주변에 있는가. 당신의 데스크로서 기능하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인연을 쉬이 놓지 않길 바란다. 쪼그려 앉아 눈물만 흘리는 흔들리는 어깨의 2년 전 나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희망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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