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군인일 때 한동안 일어나면 유서를 써보는 게 바라던 습관이었다. 결과적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왜 그 습관을 바랐냐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는 책의 내용을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다소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내용과 유사한 결이다. 읽은 지가 오래돼 어렴풋이 밖에 기억을 못하는데 책의 내용은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에 충실하자는 단선적인 편이었다. 유서는 유언을 담는 글이다. 유언은 모두가 알다시피 죽음을 맞이하여 쓰는 글이다. 곧 유서는 내가 내 마지막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 무슨 말을 남기고 싶은지 고민하고 쓰는 글이다.
유서를 쓴다는 것이 꼭 극단적 선택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살면서 소중한 인연들에게 편지를 쓴다. 손편지를 통해 대면하여 말하기는 부끄러웠던 솔직한 내 마음들을 전하고 애정을 표현하며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 마지막 손편지가 곧 유서가 아닐까. 쓰다보면 현재의 나에게, 현재까지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해온 사람들을 빠짐 없이 쓰고 싶어진다. 마치 연예대상 수상소감을 전할 때 그 누구도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쓰다보면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내 고맙고 사랑하는 감정을 오롯이 담고 싶다.
그리고 그 글은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 없는 나를 마주하고 나에게 남기는 진솔한 말들이다. 가장 자전적이고 반성적이며 가장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언어들이다. 살면서 나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있나, 아마 아무도 없을 걸. 그런데 이 글에서는 쓸 수 있다. 나는 나의 이런 점들이 후회가 됐고 이런 점들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아 돌이켜보니 그게 참 아쉽더라 라는 말들을 스스로 글로써 전할 수 있는 글이다. 내가 자전적 에세이를 쓸 기회를 얻지 않는 이상 그건 중요한 기회다.
그럼 왜 아침이냐. 내가 생각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아침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지 않은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하루에 대한 다짐을 가질 때, 나의 어제를 돌아보고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오늘은 무엇을 통해 날 좋아할 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둘째로 아침은 가장 냉철하고 이성적일 수 있는 시간이다. 저녁이나 새벽에 쓰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요상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아침에 쓰면 그래도 일어나서 세면하고 머리를 감고 유서를 쓰는 괴짜 정도로만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유서를 작성하는 행위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지만 그게 꼭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준비 없이 태어났으면 마지막은 준비하고 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순간을 부정하고 회피하며 영원을 꿈꾸기보다 필멸을 받아들이고 그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도 나름의 충족감 있는 삶을 위한 하나의 방안이 아닐까?
마지막을 사념함으로써 지금을 바라본다. 현재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하면 후회가 없을 지 하나 하나에 진정성을 담은 행보를 떼는 첫 걸음에 용기를 얻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