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산에서 안토니 곰리전을 보고 이어 붙여 호암에 들러 루이스 부르주아 전을 보러 갔다. 리움의 정원에서 한참을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거미>가 호암정원으로 옮겨진 후 멀리서는 볼 수 있을지언정 접근은 되지 않아 혹시나 이번 전시에 이 대형 <거미>작품에도 접근이 되나.. 기대를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 보다 작은 <거미>작품이 실내에 1점, 외부에 1점 있어 이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거미>만으로만 알던 작가의 다른 여러 작품들과 작품세계를 접한 것은 내 취향과 별개로 의미있었다.
루이스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
The Evanescent and the Eternal
2025. 8.30 ~ 2026. 1.4
호암미술관
입구에 대형으로 걸려있던 작품
이후로도 이 모티프는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입구의 대형 작품의 원형같은 작품들
마망(거미)작품의 중심은 이 모티프의 변형같다.
부르주아는 얼굴은 거세한 채 팔다리, 몸통을 활용한 작품이 많았다.
입구 초입부터 이러한 작품들이 줄줄이 있는데 내가 거미를 중심에 두고 예측한 부르주아의 작품세계는 따사롭고 애틋한 그 어느 지점의 것이었는데 실상은 스산하고 고독하고 절망하는 어느 지점의 것들이 훨씬 많았다.
거의 유일하게 따뜻한 정서에 천으로 표현한 강이 이리도 자연스럽고 다채롭고 무궁하여 신선했던 작품
마티스가 생의 끝자락에 종이접기/종이자르기로 또 다른 위대한 작품세계를 열 듯, 그녀의 99년동안의 고단한 인생 끝자락은 조금은 안정되고 고요한 마음이 일어 자연을 소재삼은 이런 패치 작품을 했다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2007년, 그녀가 사망 3년전에 남겨둔 작품이었다.
대망의 거미 작품
실내에 있기에 적당한 크기다.
헤이그 시립미술관에서 두마리 거미가 엉킨 실내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규모는 비슷하지만 전시 방식에서 역시 호암이 한수 위
규모로 압도하는 거미 작품을 이미 경험한 여러 관객들 앞에 리움은 이 작은 거미의 배경에 기괴하고 긁는 목소리의 배우가 등장하는 영상(작가인가...)을 배치하여 다양하고 입체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게 했다. 거미를 엄마에 빗댄 작가는 끊임없이 엄마를 갈망했지만 끝내 갖지 못한 듯한 비참함이 영상 내내 뚫고 나왔다.
작가는 아버지와의 관계도 안정적이지 못했나...
부모와의 관계가 평생의 작품세계를 관통한다는 것이 끝내 독립하지 못한 성인의 불완정성과 뒤틀림처럼 불편한 마음이 들긴 했다.
아라리오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류인의 작품이 떠올라 한참을 바라보았다.
거미 다음으로 이 작품이 나는 좋았다. 전시를 관통하고 있는 불안함과 기괴함의 감정을 덜어내고 독립적으로 감상하기에 좋아서였다. 자코메티의 길죽한 인간들 처럼 이미 봐 오던 초식을 마주한 편안함도 한 몫했다.
그녀가 표현한 이 다리가 혹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긴 그림자 속 다리일 수도, 발이 공중에 떠있는 것이 목을 메단 어떤 인간의 다리부분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지언정, 그런 맥락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존은 조각 작품 뒤 홀로그램 시리즈로 공간을 구성해 두었다. 뒤의 홀로그램 작품은 옆에서 보면 왼쪽처럼, 정면에서 보면 오른쪽처럼 입체감이 살아난다.
댕강 잘라낸 목을 철창 안에 대롱 매달아 둔 작품.
미술에 늘상있는 두상 형태의 작품 뿐 일 수 있는데 나는 부러 머리만 잘라내 걸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지배가 반영된 듯한 작품들
이 정도 되니 보는 것이 괴롭기까지 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다 보니 이번에 새로 생긴 호암의 카페 옆쪽 야외에 작은 거미 작품이 전시되 있었다. 숨통이 조금 틔였다.
부모에 대한 특히 엄마에 대한 강한 유착과 집착으로 평생의 예술세계가 이뤄진 작가라는 것을 (여러 다른 면도 있겠지만) 알게 되니 그녀가 세계적으로 어떤 존중과 예우를 받던 간에 나는 못내 불편해 앞으론 기회가 되 그녀의 다른 작품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이 불편한 마음들이 기억날 듯하여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