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진 따라 <젖과 알> 읽기

독서감상문

by derMond

오랜만에 소설책을 한 권 도서관에서 빌렸다. 사실 최근 청소년 문학의 대표적 도서라는 <아몬드>를 읽으려고 빌려두긴 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읽지 않고 연장 버튼만 눌러둔 지 오래다. <젖과 알>을 빌리기로 마음먹은 건 정말 단순하게 르세라핌의 허윤진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렬독서를 하는지 많은 책들을 갖고 다니는 것이 콘텐츠에 나왔고 책 리스트가 알려졌다. 그중에서 존 버거와 벨 훅스는 내가 접해본 학자들이며 또 그들의 책을 꽤 재밌게 읽었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겼다. 특히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아주아주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문장들이 좋아서 언론고시 시험을 볼 때면 자주 인용해 먹었었고, 인용했을 때 논술 필기도 몇 번 붙었었다. 하하하. 최근에는 신입생 세미나 책으로 추천하기도 했었다. 사실 벨 훅스나 존 버거의 책들은 모두 석사 과정을 지내며 접하게 된 책이었다. 존 버거의 책은 동기 덕분에, 벨 훅스는 수업에서. 동기는 학부시절 읽은 책이라고 하니 나는 인문사회철학 이론서들과는 꽤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론고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까지의 나는 주로 고전 문학을 좋아하고 읽었으며, 문학동네 전집을 전부 책장에 진열하고픈 욕심을 가진 소비자이기만 했다. 그때 사둔 문학동네 세계 전집 중 아직도 안 읽은 게 있다는 점에서 독서가라기 보단 소비자라고 하는 게 맞다. 어쨌든 고전 소설을 주로 읽었던 나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며 한국의 현대 소설 작가들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유명한 작가당 그 작가의 소설 한 권씩은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도장 깨기 하듯이 김영하, 김연수, 김애란, 정유정 등등등을 찾아 읽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나서부터는 방학마다 소설책 5권씩 읽기.........를 목표로 했었는데... 학기 중에는 논문과 어려운 이론서들 같은 것들만 읽다 보니 스스로가 건조해지는 기분이어서 그렇기도 했다. 어쨌든 그 목표는 지켜질 때도 있었고 못 지킬 때도 있었던 그런 목표였다. 최근에는 못 지킨 적이 더 많은. 대학원 생활을 할수록 확실히 지쳐가는 듯도 하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로라 멀비의 남성적 응시(male gaze)처럼 시선의 관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관점의 전환을 깨닫게 하는 책은 언제나 감동으로 기억되는 법이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무엇을 묘사하고 재현할 것인가의 선택 역시도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짚는 이야기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PD로서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선택지에 무엇을 제외하고 무엇을 포함할 수 있는가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다. 시선에도 권력이 있다는 말은 당연하지만 문장으로 발화해 정의하는 게 당연하지는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존 버거의 책을 좋아했다. 벨 훅스는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일부를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베티 프리단을 비판한 학자로 인상 깊었다. 페미니즘의 문제를 계급 중심으로 풀면서 이 역시 나에게 관점의 전환을 만들어준 학자였다. 베티 프리단을 향한 비판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내가 가진 정체성이 간과할 수 있는 부분들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고, 때로는 어떤 오만을 경계할 수 있도록 하는 책들을 좋아한다.


어쨌든! <젖과 알>을 빌린 것은 순전히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허윤진이라는 사람이 고른 책 리스트가 제법 나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심 방향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그녀가 고른 소설책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도서관에서 바로 빌렸고 빌린 지 며칠 지나서 바로 읽어버렸다. 어쩐지 이것만은 미루면 안 될 것만 같아서.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무척 두꺼운 영어번역본이었던 것 같은데 한국에는 <젖과 알> 그리고 <당신들의 연애는 빈사>라는 두 편이 담긴 얇은 책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다 읽어버릴 수 있었다. 책장을 덮고 처음 생각한 것은 이 소설 혹은 가와카미 미에코라는 작가와 관련된 해설서를 읽고 싶다 였다. 대학원생이라는 정체성이 가진 일종의 직업병일까. 이 소설을 둘러싼 해설이나 오간 논의 혹은 일본 사회의 담론 등이 먼저 궁금해졌다. 내가 생각한 바를, 내가 느낀 바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서. '옮긴이의 말'부터 바로 펼쳐서 읽어보았을 때는 매우 실망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이나 여성주의석 서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번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의 말속에서 주인공 언니의 고민은 그냥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물론 번역은 읽기 좋게 잘해야 하는 게 맞지만 원작의 난해성을 지워버렸다는 점도 아쉬웠다. 원작은 간사이 방언이라고 하는데 그런 표현의 맛이 사라진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학교 학술정보원에 관련 해설이 있을까 찾아보았고 논문 2편을 발견했다.


가와카미는 보수적인 일본에서 '여성'에 관련하여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가였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분들에 대한 해석은 페미니즘과 떨어질 수 없기도 했다. 미도리코가 던지는 여성의 신체와 신체 변화에 대한 질문들은 그 나이대의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경험할 수 있는 자기 신체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사회는 여성의 신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고 여성의 신체 변화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무지는 자기혐오의 빌미를 제공한다고도 생각한다. 미도리코의 일기에서 드러나듯이 생리 등 여성들의 2차 성징이나 신체 변화는 출산과 함께 논의되는 일이 많았다. 내가 가진 나의 신체가 다른 생명을 위한 도구처럼 설명되는 건 당연히 별로다. 여성들의 신체가 온전히 여성들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도구로 여겨지도록 만드는 사회 담론은 자신의 신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 괴리감을 심어준다. 나의 것임에도 나의 소유물이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인해서. 여성들의 신체는 사회 속에서 도구로 전유되고 이 같은 여성 신체를 둘러싼 담론은 존 버거가 말한 '시선 권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신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누리지 못하고 사회가 바라는 대로 혹은 사회가 구성해 온 규범적 담론 안에서 재구성하려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자의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마키코의 가슴 확대 수술 고민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되기도 한다. '나'가 가슴 수술과 관련해서 나눴던 과거 친구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가슴 수술과 화장이 비교 선상에 놓이는 언쟁은 한국 사회의 논쟁과도 유사해 보인다. 어쨌든 다양한 방식으로 가와카미는 <젖과 알>에서 여성의 신체를 이야기하고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국내의 논문 2편은 모두 '신체'가 분석의 주요한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난자와 관련된 미도리코의 일기로 시작해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키코 모녀의 알을 던지고 깨뜨리는 장면은 <젖과 알>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꽤 직관적으로 드러나게 해 준다. 이러한 '알'이 여성의 신체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가와카미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도록 한다. 결국 각자의 몸에 계란을 깨부수는 행위를 통해 모녀는 화해하고 또 모녀가 각자 직면했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의문이나 일종의 자기혐오를 전복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가와카미가 '선택할 수 없는 신체'로서 '여성'을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태어난 곳, 부모에 의해 습득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서 언어(간사이 사투리)를 소설에서 활용(신이수, 2022)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하다. 선택할 수 없는 무언가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를 비판하는 것이 어려워진 한국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논문에서 설명해 주는 이런 부분 때문에 번역을 '특정 지역에 대한 선입견'때문에 사투리로 하지 않고 무난하게 서울말로 했다는 옮긴이의 말이 더더욱 아쉽다. 보편성을 가졌다고 느껴지는 서울말을 선택하여 번역되었다는 한국어 번역본 책 자체가 가와카미가 가진 주제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듯도 하다. 이 역시도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질문을 하게 한 존 버거의 논의와도 맞닿아 보인다. 소설에서 가장 의문이 많은 미도리코는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 사회의 주요 규범과 담론에 익숙해져서 순응하게 되는 사람들과 달리 미도리코는 여성의 신체에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희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의 관심사도 여성들의 신체와 삶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까 불안정성과 불안한 노동자 정체성을 기반으로 여성 신체에 대해 논한 명혜영(2019)의 논문보다는 신이수(2022)의 논문이 더 흥미롭게 읽혔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최근 한국의 여성주의 문학과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전에는 일본 문학과 국내 문학의 기본적인 무드 차이를 느끼면서 일본 문학은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비슷한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까, 문제의식의 결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몇 년 사이 한국 작가들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조함이 떠올랐다. 최근 읽었던 소설들은 어쩐지 내겐 또 다른 학술서 같은 느낌을 준다. 감정적으로 만들기보다는 나를 이성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문학을 통해서 감정의 널뜀을 간접 체험하곤 했던 나에게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들의 시선이, 그들의 삶이 이만큼이나 담겨져왔던 시기가 있었을까 생각한다면 과도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가와카미 역시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기록하고 형상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고 하니(신이수, 2022) <젖과 알>을 향한 감상이 이렇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분명히 좋은 글과 작가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다시 또 내가 읽어보지 않았던 작가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중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디 독서라는 실천으로 옮길 줄 아는 내가 올해에는 부디 되길 바라면서. 윤진이 덕분에 오랜만에 소설도 읽고 생각도 해볼 수 있었던 시간. 끝.



명혜영. (2019). 가와카미 미에코(川上未映子)와 황정은 문학의 프레카리아트 - ‘휘발하는 몸’의 역설을 중심으로 -. 일어일문학연구, 111(0), 297-314.

신이수 (2022). 가와카미미에코(川上未映子)의 문학과 여성의 몸 —소설『젖과 알』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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