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들의 제주

날씨 요정은 따라오지 않았지만

by 해봄

지난주부터 제주에 머물고 있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벌인 일들이

곧 펼쳐질 텐데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육지로부터 도망친 준비 운동 시간.

겉으로 보이기에는 힐링이지만

사실은 적나라하게 나 자신을 직면하는 시간




지난주부터 제주는 흐렸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차갑다.

서울에 있는 친구는 날이 따뜻해서

한강에 누워있다는데, 나에겐 지금 제주가 참 춥다.


제주에 혼자 올 때는 항상 셰어하우스에 묵는다.

다양한 사람을 ‘보고’ 싶어서!

낯선 집단에 나를 며칠간 던져놓는 훈련이다.

아픈 날 다스리겠노라고 매일 내 속만 들여다보는

대신 나 이외의 사람을 보고 싶어서.


난 흐린 제주가 꽤 좋다. 춥다는 것 빼고는

무언가 특별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게 되니까.

내 상태로 가득 채운 여행지의 하루는 무리인데,

특별히 무얼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지 않아서 좋다.


하지만 다른 여행자 친구들은

흐린 날씨로 인해 무얼 찍어도 사진이 예쁘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여행지가 제한되고,

시간을 쪼개 이곳저곳 여행하기에도 불편하니

흐린 날씨가 안타까운 모양새다.


꽤 부러웠다.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아 안타깝다는 것은

여행지에서 경험해 보고 싶은 게 많고

그만큼 기대하고 설렜을 게 틀림없으니 말이다.


나는 아직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아 안타깝지 않다.

나에게 제주는 도피처이기도 하고

생 날것의 사회에 날 던져놓는 캠프이기도 하다.

나에게 제주는 여행이 아니고 미지수였다.

아직 여행을 즐기는 것보다 일상이 버거운 게 크다.


그 와중에 집에서는 편안하게 마음껏 힘들어하다

셰어하우스에 오면 덜 힘든 척하고

더 괜찮은 척해야 하니 제주에 오는 건 숙제다.

어떻게든 사회 안에 아픈 나를 적응시키려는 숙제



그래서 그런가

오히려 날씨가 좋지 않아 마음에 든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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