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부러운 너

왜 넌 교사고 난 아닐까

by 해봄

"학교에서 양치를 하는데 행복해"

그 한 마디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문화 충격과 부러움.


물론 그 친구의 교직생활도 험난하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잘 알면서도

난 그 친구가 부러웠다. 사무치게 억울할 만큼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친구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깍듯이 높여 부르는 건 절대 아니고 애칭으로!

처음엔 그 장난스러운 호칭조차도 부러웠다.

나는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원교사로 살아오며 은연중에 '교육자'로서의

전문성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건

슬프지만 이제 몸에 배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에 대해

시샘은 하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익숙하달까.




그 친구는 교직 만족도가 정말 높은 교사였다.

반대로 나는 교직 만족도가 떨어지다 못해

추락하기까지 한 교사였다.


대체 우리는 왜 같은 교원양성과정과 임용고사를

거쳐 같은 지위의 공립학교의 교원이 된 것인데도

이렇게 천지차이일까?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내 교직만족도가 낮다 못해, 교육자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다는 건.

내 태도에 문제가 있고 멘탈이 약하기 때문일까?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부러움'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나는 점점 작아졌다.

나는 내가 교육자라는 걸 항상 설명해야 했고,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선생님'인데, 호칭이 같아도 같지 않은 느낌.




너무 부러운 마음에 항상 신기했고

나도 단 하루라도 저렇게 교직에 만족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난 그 선생님과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섬을 떠나도 계속 남는 친구로.

계속 근처에 두며 나를 바꾸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유아교육의 환경은 절대 바꿀 수 없으니...!



우리가 교직생활을 하며 만족하는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학생들을, 아이들을 위한 마음으로
애정을 주고 그 애정이 변화와 성장의
자양분이 되었을 때!

그 순간 교육자로서의 보람을 느끼는 것,

결국 교사로서 행복한 순간은 같았던 거였다.



물론 친구가 속한 조직의 문화와,

내가 속한 조직의 문화는 천지차이지만

그 친구의 학교생활이, 업무가 나보다 편하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의 업무도, 고충도, 애환도 고통스러울 게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치원의 폐쇄적인 문화.

교사를 희생시키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낮추는 조직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 유치원 교사로 돌아가더라도

그 친구만큼 행복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행복한 교사가 되는건 꿈꾸지 않고

아프지 않게 교직생활을 하는 교사가 되기를 소망

한다. 그저 살아내는 교사.


나와 다르게 그 친구는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건강한 방법으로 충분히 해소하고 있었고,

나는 유치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흡수해

버려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이건 분명 내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는

요소 같았다.




그렇게 친구는 나의 실낱같은 희망이 되어 버렸다.

교직에 만족하는 교사를 실제로 만나 보고,

나의 교직생활도 '버틸 만 해지는'날이 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부디 단 하루라도 유치원의 부속품이 아닌

온전한 교육자로서의 교사로 살아보고 싶다.

그래야 마음 가볍게 교사 자리를 후회 없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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