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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Feb 11. 2024

녹슬고 찌그러진 철밥통

안정적으로 괴로운.

요즘은 참 불편하다. 몸도, 마음도

이제 내가 아픈 건지, 아니면 꽤 괜찮은 데 아프다고

생각하는 건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놓아 버리면 정말 괜찮을 것 같으면서도,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교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아니, 한이 맺혔다.




누군가는 이런 내게

‘휴직하며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고 살고, 여건만 되면

돌아갈 철밥통 같은 직장이 있는데 배부른 소리.‘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철밥통은 이미 녹슬고, 이리저리 던져져

찌그러진 지 오래다.

밥그릇이 있기는 한데 상태가 영 별로다.

그 밥그릇에 담아 먹는 밥은 나를 상하게 할 것 같다.



이 철밥통 직장은 이름값 그대로 매우 안정적이다.

안정적,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유지한다는 뜻.

그런데 슬프게도 그 안정성은 나에겐 최악이었다.

안정적으로 지옥 같은 삶.

나에게 ‘안정적’이라는 말은

지옥 같은 삶이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임을 뜻했다.




철밥통은 깨지지 않지만,

여기저기 던져지면 충분히 찌그러지고도 남는다.

본래의 밥그릇 모양을 잃는 셈이다.

내 철밥통도 그러했다.

나는 교육하는 철밥통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얌전히 복종하지 않으면 던져지는 철밥통.


찌그러진 철밥통은 살기 위해 휴직을 선택했다.

불합리한 이유로 던져서 찌그러진 것이니, 충분히

쉬고 귀책사유는 국가에 있다는 판정도 받았다.

그런데 너무 오래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해서인지

요즘 내 철밥통은 찌그러지다 못해 녹슨 모양새다.

여기에 밥을 담아 먹으면 무조건 탈 날 것 같은...!




애초에 임용고시를 본 건 철밥통 때문이 아니었다.

나에게 급여를 주는 주체가 원장이 아니길 바랐다.


자유로움과 융통성을 최대 덕목으로 삼으며,

상황에 따라 외부요인보다는 내 신념에 기반해

행동하는 것을 추구하는 나는

역시나 공무원 조직에 참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확실하고,

매 상황마다 대처 방법이 다르고, 아이마다 배워야

할 것이 다르고, 규격화된 진도가 없는 유아교육은

힘든데도 ‘천직인가?’ 싶을 만큼 재밌었다.


교육과정 수업을 끝내고 나오면 진이 빠질 만큼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지만 교실은 희로애락이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반면 교무실은 인간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곳이었다.

교무실에 오래 있으면 굳다 못해 석상이 된 기분.




전문성을 인정받은 공교육 교사였지만 실상

나는 허수아비 담임교사고

우리 반을 운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원했던 교육의 자유, 융통성 있게 가르칠

권리는 철밥통과 함께 이리저리 던져졌다.

철밥통이 던져질 때, 내 삶의 신념과 작고 소중한

교사로서의 존엄이 함께 던져졌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의 병은 유치원을 떼어내지 않고는 영영

차도가 없을 듯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20대는 다 유치원이었다.

돌아가자니 그럴 상태가 되지 않고,

더 휴직하자니 쉬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다.

철밥통은 버리기로 마음먹었지만,

지금 버리기에는 내 작고 소중한 존엄을 살려내고

버리고 싶은 마음.


녹슬고 망가진 철밥통을 품에 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용기를 부르짖는 사람이지만 사실 용기 없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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