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허무한 허과장 2부:껍데기 말고 알맹이로 살기

제13화: 만 원의 불꽃

by 흐릿한형체




1. 침을 삼키듯 삼킨 자존심


박 사장이 찔러준 만 원짜리 지폐는 주머니 속에서 가시처럼 허 과장의 허벅지를 찔러댔다. 예전 같으면 바닥에 내팽개쳤을 돈이었지만, 지금의 허 과장은 그럴 수 없었다. 편의점 도시락 세 번, 혹은 아이의 문제집 한 권을 살 수 있는 '실질적 가치'가 그 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허 과장은 낡은 수첩을 펼쳐 오늘 하루의 수익을 정리했다.


[배달 15건: 52,500원 / 박 사장 팁: 10,000원 / 총 62,500원]


'팁 10,000원'이라는 글자 옆에 한참 동안 펜 끝을 머물게 했다. 자존심은 구겨졌지만, 그 돈 덕분에 목표액을 채웠다. 굴욕은 잠깐이지만 굶주림은 길다는 사실을, 허 과장은 16년 차 대기업 과장이 아닌 2주 차 배달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2. 시장의 빈틈을 보다


다음 날, 허 과장은 박 사장의 사무실이 있던 공단 지역을 다시 찾았다. 박 사장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어제 배달을 하며 눈여겨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단 지역은 식당가와 거리가 멀어 배달 수요는 엄청난데, 길목이 좁고 미로 같아 배달 기사들이 기피하는 '똥콜' 지역이었다. 하지만 16년간 이 지역 거래처를 돌았던 허 과장에게 이곳은 자기 집 앞마당보다 익숙한 곳이었다.


'여기는 지름길이 있는데. 이 건물 뒤쪽으로 가면 5분은 단축될 거야.'


허 과장은 남들이 피하는 공단 지역 배달을 집중적으로 잡기 시작했다. 남들이 큰길로 돌아갈 때, 그는 거래처 직원들만 아는 쪽문과 화물 엘리베이터 위치를 이용해 배달 속도를 두 배로 높였다. 16년 동안 쌓은 짬밥이 엉뚱하게도 배달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이터'가 된 것이다.


3. 노비에서 장사꾼으로


"어? 아저씨 또 오셨네? 진짜 빠르시네."


지식산업센터의 경리 직원들이 허 과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헬멧을 썼지만, 그가 건네는 인사의 톤이나 정중함은 일반 배달원들과는 달랐다.


"여기가 점심에 커피 배달이 잘 안 오죠? 다음부턴 제 개인 번호로 미리 말씀해 주세요. 근처 지나갈 때 픽업해 드릴게요."


허 과장은 슬쩍 자기 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건넸다. 배달 앱의 수수료를 떼지 않고, 동선을 최적화해 단골을 확보하려는 생존 전략이었다. 대기업에서 '기획안'을 쓸 때는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4. 다시 울린 전화기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박 사장이었다.


"어이, 허 과장. 어제 말한 거 생각해 봤어? 우리 회사 영업직 말이야. 아는 얼굴끼리 돕고 살아야지. 연봉은 예전 회사 절반 정도 줄 수 있는데, 뭐 배달보다야 낫지 않겠어?"


박 사장의 목소리엔 여전히 '내가 너를 거둬준다'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예전의 허 과장이라면 덥석 그 밧줄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허 과장은 자신의 손에 묻은 땀 냄새와, 방금 번 3,500원의 선명한 가치를 알고 있었다.


"사장님, 제안은 감사한데... 지금 하는 일이 꽤 적성에 맞네요. 나중에 제가 사장님 회사 물건 배달하러 갈 일 있으면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허 과장은 헬멧 실드를 올렸다. 매연 섞인 공단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비록 몸은 고됐지만, 누군가의 처분에 맡겨진 '노비'가 아니라 자신의 발로 구르는 '장사꾼'으로서의 첫발을 뗀 기분이었다.

그때, 배달 앱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신규 주문: 5,200원 (거리 할증 포함)]


허 과장은 힘차게 엑셀을 당겼다. 이제 그의 목표는 단순히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이 바닥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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