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길 위의 적들
허 과장의 '공단 특화 배달'은 생각보다 빠르게 소문이 났다. 지름길을 꿰고 있는 그의 오토바이는 남들보다 두 배는 빨랐고, 단골 경리 사원들에게 커피 픽업 서비스까지 제공하자 공단 내 점심 콜은 허 과장이 독식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그 동네를 오랫동안 장악해온 베테랑 라이더들이 이 '샌님 같은 신입'을 가만둘 리 없었다.
"어이, 아저씨. 잠깐 서봐."
배달을 마치고 나오는 허 과장의 앞을 오토바이 세 대가 가로막았다.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헬멧 실드를 올리며 침을 뱉었다.
"당신, 여기서 개인 번호 뿌리고 다닌다며? 배달 앱 상도덕 몰라? 여긴 우리가 십 년 넘게 지킨 구역이야. 적당히 하고 꺼져."
허 과장의 가슴이 요동쳤다. 대기업 과장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저는 그냥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요."
"이 양반이 말귀를 못 알아먹네. 좋은 말로 할 때 딴 동네로 가라고. 아니면 오토바이 타이어 구경 좀 시켜줘?"
남자의 위협적인 기세에 허 과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글 같은 시장 바닥에는 넥타이 부대와는 다른 날것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위협을 뒤로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하던 길, 허 과장은 집 근처 상가 뒤편에서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평소라면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아내였다.
아내는 허름한 식당 앞 평상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마늘을 까고 있었다. 굽은 등에 밴 땀, 빨갛게 짓무른 손가락. 아내가 남편 몰래 식당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직감한 순간, 허 과장의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나 하나 잘리면 우리 가족은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모르는 척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배달 통에 담긴 굴욕과 박 사장의 팁 1만 원에 울컥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장사꾼'이 되겠다고 설레는 동안, 아내는 소리 없이 '생존'의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허 과장은 아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골목 어귀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헬멧 속으로 눈물이 흘러 턱 끝을 적셨다. 예전 같으면 아내의 손을 잡고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알았다. 그 소리침이 아내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을 가리기 위한 '비겁한 자존심'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눈물을 닦고 오토바이 핸들을 꽉 쥐었다.
'무서워서 피하면 평생 노비로 남는 거야.'
그는 아까 자신을 위협했던 라이더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마늘을 까던 아내의 짓무른 손을 떠올렸다. 허 과장은 이제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제는 단순히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다시 보드랍게 만들어주기 위해 싸워야 했다.
집에 돌아온 허 과장은 노트북을 켰다. 16년 동안 지겹도록 썼던 엑셀과 파워포인트. 회사를 위해 썼던 그 재주를 이제는 자신을 위해 쓸 차례였다.
그는 공단 내 식당들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기사들이 기피하는 동선과 시간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배달원이 아니라, 공단 맞춤형 배달 대행 시스템의 '설계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박 사장님, 김 대리님. 당신들이 비웃던 허 과장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지켜보시지."
허 과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것은 대기업 노비의 눈빛이 아니라,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야수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