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허무한 허과장 2부:껍데기 말고 알맹이로 살기

제15화: 넥타이를 푼 협상가

by 흐릿한형체




1.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다


다음 날 아침, 허 과장은 배달 앱을 켜는 대신 공단 입구 컨테이너 박스로 향했다. 어제 자신을 위협했던 '공단 라이더 연합'의 아지트였다. 입구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거친 엔진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어이, 저 양반 또 왔네. 어제 내 말이 말 같지 않았나 보지?"


어제의 그 험상궂은 남자가 가래침을 뱉으며 일어섰다. 주위 라이더들이 하나둘씩 허 과장을 에워쌌다. 하지만 허 과장은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품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싸우러 온 거 아닙니다. 돈 벌게 해 드리러 왔습니다."



2. 시장의 문법으로 말하다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서류를 훑었다. 거기엔 허 과장이 밤새 정리한 공단 내 식당 50곳의 점심 배달 동선 최적화 지도와, 각 건물별 화물 엘리베이터 가동 시간표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우린 이런 거 없어도 길 다 알아."


"길은 아시겠죠. 하지만 '시간'은 모르실 겁니다. 공단 건물들은 점심시간에 일반 엘리베이터를 타면 15분씩 잡아먹습니다. 하지만 화물용은 비어 있죠. 제가 정리한 이 루트대로 움직이면 지금보다 배달 건수 1.5배는 더 칠 수 있습니다."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 과장은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저는 혼자 다 해 먹을 생각 없습니다. 대신 제가 확보한 직거래 식당 물량을 형님들께 나누겠습니다. 수수료는 앱보다 낮게 책정하죠. 전 배달 효율을 관리하는 '컨트롤러' 역할을 하겠습니다. 형님들은 그냥 달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3. 노비의 기술, 장사꾼의 무기


라이더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매일 앱에서 뜨는 '똥콜'을 잡으려 눈치싸움을 하느니, 확실한 물량과 최단 루트가 보장된 시스템이 훨씬 이득이라는 걸 그들도 직감했다.


"당신, 이거 왜 우리한테 주는 거야? 혼자 벌면 되잖아."


"아내 손이 마늘 독에 올라서요. 혼자 벌어서는 그 손 다시 깨끗하게 못 만들어줄 것 같거든요."


허 과장의 진심 섞인 한마디에 험악했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라이더 우두머리는 서류를 챙기며 툭 던졌다.


"이 양반, 샌님인 줄 알았더니 구린 구석은 없네. 좋아. 딱 일주일만 해보자고. 수익 안 나오면 그땐 진짜 오토바이 압수야."



4. 뒤바뀐 점심 풍경


그날 점심, 공단에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허 과장이 무전기를 들고 건물 입구에서 라이더들의 동선을 지휘했다.


"1번 라이더님, 지금 3동 화물 엘리베이터 비었습니다. 그리로 가세요! 2번님은 식당에서 픽업 대기하세요!"


전쟁터 같던 공단 배달이 톱니바퀴 돌듯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심 한 타임이 끝나고 정산된 금액은 평소보다 30%나 높았다. 라이더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고, 허 과장의 주머니에는 정당한 '관리 수수료'가 쌓였다.

퇴근길, 허 과장은 아내가 마늘을 까던 식당 앞을 지나갔다. 여전히 굽은 등으로 앉아있는 아내를 보며 그는 다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대감집 노비가 아니라, 이 바닥의 주인이 되어서 당신 데리러 올게.'


허 과장은 처음으로 헬멧을 벗고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넥타이를 풀고 마주한 세상은 잔인했지만, 동시에 노력한 만큼의 숫자를 정직하게 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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