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헬멧 너머의 아는 얼굴
배달 일을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 허 과장은 자신의 무릎 관절이 16년 동안 사무실 의자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처절하게 깨닫는 중이었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이 씨, 왜 이렇게 안 와!"
치킨 배달이 5분 늦었다는 이유로 현관문 앞에서 삿대질을 해대는 젊은 남자를 보며, 허 과장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예전 같으면 '어린 놈이 예의가 없네'라며 속으로 혀를 찼겠지만, 지금은 그저 1점짜리 별점 테러가 무서워 비굴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비가 와서 길이 좀 막혔네요. 맛있게 드십시오."
문이 쾅 닫혔다. 허 과장은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16년간 대접받던 '허 과장'의 자존심은 3,500원짜리 배달 수수료 앞에서 먼지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마지막 배달지는 공단 근처의 낡은 지식산업센터였다. 허 과장이 예전 회사에서 거래처 관리를 위해 자주 드나들던 동네였다. 헬멧을 고쳐 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러니까 이번 단가는 도저히 안 맞는다니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 사장'이었다. 허 과장이 과장 시절, 하청업체 사장이라며 은근히 아랫사람 대하듯 부리던 이였다. 당시 박 사장은 허 과장에게 명절마다 선물을 보내고, 술자리를 계산하며 "허 과장님, 잘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허리를 굽혔었다.
허 과장은 본능적으로 헬멧 실드를 내렸다. 하지만 박 사장은 전화 통화를 하며 복도로 나오다 허 과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 배달 오셨어요? 거기 테이블에 두세요."
박 사장은 허 과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흔한 배달 기사 중 한 명으로 치부하며 다시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허 과장은 안도하면서도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갑'이었던 자신이 이제는 그의 눈길조차 머물지 않는 '익명의 노동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음식을 내려놓고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 사장의 경리 직원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허 과장이 방문할 때마다 커피를 타 주던 친구였다.
"어머, 허 과장님 맞으시죠?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경리 직원의 목소리에 전화를 끊은 박 사장이 돌아보았다. 헬멧 실드 너머로 허 과장의 퀭한 눈이 박 사장과 마주쳤다. 정적이 흘렀다. 박 사장의 눈에 당혹감, 경멸, 그리고 이내 묘한 우월감이 스쳐 지나갔다.
"허 과장? 아니, 이게 누구야. 대감집에서 떵떵거리던 허 과장 아니신가!"
박 사장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예전의 비굴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이고, 거 대기업 다니더니 이제 이런 사업(?)도 시작하셨어? 진작 말하지. 내가 콜 많이 불러줬을 텐데."
박 사장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허 과장의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옛날 정 생각해서 팁이야. 가서 시원한 거나 한 잔 사 드셔. 아, 그리고 우리 회사 지금 영업직 하나 구하는데... 생각 있으면 연락해. 아는 처지에 내가 야박하게 굴겠어?"
허 과장은 가슴에 꽂힌 만 원권을 내려다보았다. 1부에서 김 대리가 주었던 2,000원보다 더 무겁고 굴욕적인 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돈을 돌려주지 못했다. 오늘 밤 갚아야 할 리볼빙 이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 고맙습니다, 사장님."
허 과장은 헬멧을 쓴 채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껍데기를 버리는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하지만 그는 핸들을 꽉 쥐었다. 이 굴욕을 견디는 것 또한, 이제 그가 감당해야 할 '진짜 삶'의 일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