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허무한 허과장 2부:껍데기 말고 알맹이로 살기

제11화: 계급장을 떼고 보니

by 흐릿한형체




1. 출근길이 아닌 배달길


어김없이 아침 7시에 눈이 떠졌다. 16년 동안 몸에 익은 무서운 습관이었다. 평소라면 빳빳하게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었겠지만, 이제 허 과장이 집어 든 것은 목이 늘어난 기능성 티셔츠와 무릎 보호대였다.

아내가 내민 보온병을 챙기며 현관을 나설 때, 옆집 사는 김 씨와 마주쳤다. 본사 마케팅팀에 다닌다며 은근히 허 과장을 무시하던 인물이었다.


"어라, 허 과장님? 오늘 연차인가 봐요? 복장이... 등산 가시나?"


"아, 예. 뭐 좀 하러 갑니다."


허 과장은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 헬멧을 깊게 눌러쓰며 짧게 답했다. '대기업 과장'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나니, 이웃의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 예전만큼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파할 여유조차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2. 점심시간의 역전

정오의 태양은 뜨거웠다.

허 과장은 땀에 젖은 채 어느 오피스 빌딩 로비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갓 튀긴 치킨과 시원한 콜라가 들려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던 김 대리와 본사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맛집을 예약했네 마네 하며 화기애애하게 지나갔다. 허 과장은 본능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숨기려다 멈췄다.


'내가 왜 숨어? 내 힘으로 돈 벌러 왔는데.'


그는 당당히 김 대리의 옆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김 대리는 향수 냄새를 풍기며 스쳐 지나갔고, 허 과장은 그에게서 풍기는 비릿한 승리자의 향기 대신 손에 든 치킨 냄새에 집중했다. 배달 완료 벨이 울리고 통장에 찍힌 4,200원. 16년 전 첫 월급을 받았을 때보다 더 뭉클한 숫자였다.


3. 노비의 기술, 시장의 기술

오후에는 당근마켓에 올린 마지막 물건을 팔러 나갔다. 명품도, 옷도 아닌 그가 회사에서 몰래 쓰던 '고성능 키보드'였다. 구매자는 앳된 얼굴의 취준생이었다.


"이거 정말 잘 써지나요? 저 이번에 대기업 공채 준비 중이라 큰맘 먹고 사는 거거든요."


허 과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잘 써지긴 하는데, 너무 열심히 치진 마세요. 손목 나갑니다. 그리고... 회사 들어가면 키보드 치는 것보다 남들 말 듣는 법을 더 빨리 배우게 될 거예요."


취준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떠났다. 허 과장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도 저 청년처럼 열정적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열정을 '자산'으로 만드는 법을 몰라 리볼빙의 늪에 빠졌었다는 것을.


4. 18%가 아닌 1%의 희망

밤 10시, 편의점 구석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허 과장은 수첩을 꺼냈다.

오늘 배달로 번 수익, 당근마켓 판매금, 그리고 남은 빚의 잔액.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리볼빙 이자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지만, 오늘 그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대감집 담벼락 밖에도 길은 있었고, 헬멧을 쓰고 달리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의 학벌이나 직급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수첩 맨 윗장에 이렇게 적었다. [2부: 껍데기 말고 알맹이로 살기]

허 과장은 남은 라면 국물을 들이키고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이제야 비로소, '허무한 허 과장'이 아닌 '살아있는 허 씨'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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