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정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중국에는 4대 미인이라고 전해지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명나라 중기에 그려진 사대미녀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적어도 명나라 중기 이전부터 회자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대순으로 서시, 왕소군, 초선 그리고 양귀비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서시는 춘추시대 말인 기원전 5세기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월왕 구천이 오왕 합려에게 보낸 여인입니다. 서시에 빠져 지낸 오왕은 결국 월나라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망치고 맙니다. 당대의 오자서가 서시를 보고는 나라를 망하게 할 경국지색이라는 표현을 써 경국지색이란 고어의 어원이 되는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를 살다 간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의 후궁이었다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공물이 된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녀가 북쪽 흉노족에게 가면서 지어 불렀다는 출새곡(出塞曲)이 있습니다.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겠네.”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춘래불사춘의 출처로 알려진 노래입니다.
한나라 말, 삼국지연의의 인기에 기대 선정된 가상의 여인인 초선이 있습니다.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동탁과 여포 사이에 제공된 여인입니다. 물론 한 여인을 이용해 둘 사이를 이간시켰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미인의 보통명사처럼 쓰는 양귀비입니다. 8세기를 산 양귀비는 원래 당현종의 며느리였으나 양귀비의 미모에 이성을 잃은 현종이 아들의 여자를 빼앗아 후궁으로 삼습니다. 현종은 총명했던 양귀비를 ‘말을 알아 듣는 꽃’이라는 의미의 해어화(解語花)라 부릅니다. 현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양귀비의 일족이 권력을 잡고 매관매직을 일삼습니다. 그들의 난행은 결국 안녹산의 난을 부릅니다. 수도 장안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과정에 양씨 일족은 학살당하고 양귀비는 강요된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전형적인 경국지색의 표본입니다.
침어낙안 폐월수화(浸魚落雁 閉月羞花), 이들에 대한 묘사인데 중국인의 허풍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녀들의 미모를 보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는다는 서시의 침어,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어 떨어진다는 왕소군의 낙안,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는다는 초선의 폐월, 꽃도 부끄러워 고개 숙인다는 양귀비의 수화, 그저 웃습니다.
추한 외모로 인해 나라를 망친 사례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모든 미인이 경국지색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역사의 조연이었던 당태종 이세민의 부인인 문덕황후는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나 봅니다. 형제를 죽이고 피 묻은 제위에 올랐지만, 역사상 모든 정치의 모범이 된다는 정관의 치를 이룬 이세민에겐 위징이라는 바른 소리 하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황제의 위신은 고려하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위징에 분노해 “꼬투리만 잡으면 이놈을 꼭 죽이고야 말겠다”고 이세민이 투덜거리자 황후가 말합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君明臣直)고 하였습니다.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하드립니다.”라는 말로 황제를 깨우칩니다. 그녀가 죽자 이세민은 궁궐에서도 황후의 무덤을 볼 수 있게 높은 누각을 세웁니다. 하루는 황제가 위징과 함께 누각에 올라 무덤을 자랑합니다. 이 자리에서 위징은 부모의 무덤보다 부인의 무덤을 더 소중히 하는 황제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비난합니다. 이를 알아들은 황제가 누각을 부수라 명합니다.
세대가 바뀌고 세태가 변해도 좋은 리더의 자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듣고 고치고 개선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