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신입사원 연수에 계열사였던 경주 힐튼호텔에서 식사예절 강의를 듣고 하루 숙박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인생 첫 스테이크였고, 진로에선가 만들어 팔던 다디단(어감 때문에 의도한 거겠지만, 비비의 ‘달디단’ 밤양갱은 오기) 포도주를 제외한다면 와인 또한 처음 대하는 술이었지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취기는 느껴도 술을 마신다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기는 술을 위해 존재하는 음식이니 스테이크에 대한 느낌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후 입사한 회사 창고에 많은 양의 선물용 와인이 있었습니다. 무역을 담당하던 한 계열사가 떠안은 와인을 그룹에서 각 계열사에 강매한 것입니다. 저도 총무팀 동기에게 몇 병 얻어 와인과 친해 보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와인에 대한 구애는 그 후로도 계속돼 와인이 술이 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세가 빈한하니 고가 와인은 언감생심이고 주로 가성비 와인인 ‘옐로우 테일 쉬라즈’를 할인할 때 다량 구매해 맥주에 손이 덜 가는 동절기에 두고두고 마십니다. ‘몬테스 알파 스페셜’도 선호하는 와인이지만, 역시나 경제적 허용치를 넘나드는 지점의 가격이라 가족 행사용으로만 이용합니다. 와인의 미덕은 ‘과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주, 막걸리, 맥주가 주는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술 없이 보내는 하루가 알콜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시는 틈새 술입니다.
막걸리와 맥주는 산, 갈증, 더위 같은 환경에 따라 맛의 더함과 덜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주는 때와 장소를 불문합니다.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소주만의 강점이 있고, 감동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삶을 이어갈 동기, 하루를 버티는 기대, 반복되는 일상을 털어낼 공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 이를 수 없는 곳과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달관, 아름다움에 대한 초연, 세월을 수용하는 호기(豪氣), 아픈 기억의 긍정적 각색, 부와 가난에 대한 낭만적 아이러니 그리고 안빈낙도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게 술 중의 술은 단언컨대 ‘소주’입니다.
소주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단점도 있습니다. Reset, 그 많던 장점들이 술 깨고 나면 다시 초기화된다는 것, 그래서 또 다른 날이 되면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반복되는 음주의 명분, 어찌 보면 소주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은 가장 큰 장점과도 닿아 있습니다.
세상에 소주가 없었다면?
이 험난한 세태를 어찌 헤쳐왔을지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오줌이 질끔 거립니다.
여담이지만,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삭힌 홍어입니다. 대부분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면서도 언젠가는 그 맛을 이해할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대하며 안주로 홍어가 나오면 한 점은 꼭 먹어봅니다. 오랜 세월 노력 중이지만, 매몰차게도 홍어는 아직 그 맛의 속내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