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당신은 아나요
글 | 찰리
여자 회장 위상 세우려면 저런 년 정신 상태부터 뜯어고쳐라
남편 죽고 애비는 감옥 가서 동정표로 회장 됐으면 적당히 날뛰어야지
아줌마 맨날 드라마만 쳐보니까 회사가 쉬운 줄 아네, 이제 연하남 본부장이랑 연애만 하면 되냐
이해가 안 되네요, 오너가 단지 여자라고 편들어 줘야 되나요?
외국 투자자들한테 웃음거리 되고 국가 이미지 망치기 전에 물러나요
어느 대기업 그룹의 회장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말들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실제 상황은 아니다. 지난 주말에 방영된 드라마 <비밀의 숲2> 6화의 한 장면이다.
남편의 비리 고발로 아버지를 몰아내고 극 중 대기업 회장 자리를 이어받은 이연재는 눈에 띄는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부정당한다. <비밀의 숲> 시리즈를 애청한 사람이라면 터무니없는 악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답답한 이연재의 토로에 주주총회의 캐스팅 보터이자 오랜 친구, 정략결혼의 상대일 뻔했던 성문일보의 사장 김병현은 이렇게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쓴 댓글을 왜 봐"
이연재는 한 회에 5분 남짓 정도 나오는 인물이지만 우리는 그의 서사를 따라가며 생긴 일말의 측은지심 같은 것이 있다. 현실의 대기업 회장이었다면 이런 감정이입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가 드라마 속 인물이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댓글에 마음이 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하다못해 신문 기사를 읽더라도 남들보다 적어도 2배는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다들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일도 나는 유독 화가 나거나 울컥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댓글을 읽으면 유독 스트레스가 심하다. 어쩌다 보니 여태까지 언론사에서만 일을 했다. 시청자 게시판을 모니터링하는 일부터 때론 내가 쓴 글에 대한 피드백을 댓글로 확인하기도 하고, 자료 참고 차 포털 기사나 댓글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업무의 일환이었다. 혼자 있을 때도 괜히 댓글 보면서 속상해하는데 이걸 매일 일로 하려니까 더 죽겠는 거다. 많은 사람이 보지도 않는 내 글에도 가끔 원색적인 비난이 있을 땐 머리가 띵한데, 악플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의 심정은 어떨까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항상 궁금했다. 왜 이렇게 열심히들 비판(비난?)하지 못해 안달일까!
지난해 10월 다음을 시작으로 네이버 등 포털에서는 연예뉴스 기사 댓글을 폐지했다. 또한 지난달 27일부터 네이버와 네이트는 스포츠 뉴스 댓글 역시 폐지했다. 댓글창은 익명 보장 하에 자유로운 의견을 전하고 나눌 수 있는 광장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의 장을 열었던 주체(포털)가 그것을 오히려 제지해야만 한다면 댓글창에서 일어나는 뾰족한 폭력들에 대해서도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언어폭력서부터 비하, 혐오 등의 악플도 문제지만 난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의 일견이 타인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불쾌할 때가 있다. 주로 공감을 많이 받은 댓글을 보게 되는데, 좋아요의 개수가 다수의 생각을 대표하거나 팩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은 중요하나, 고민 없는 비판은 때로 의아할 정도의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어 여론이 되고, 혐오의 굴레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댓글은 어떤 기자들에 의해 ‘누리꾼’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인용돼 대중의 목소리가 되는 걸 자주 봤다.
나도 내 생각을 모르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말
듣기 싫다 이거예요
올 3월부터 종이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백수 생활을 보내며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시작했는데 지금도 꾸준히 잘 보고 있다. 뉴스 속보나 빠른 기사는 인터넷으로 보고 있지만 조금 늦더라도 신문을 읽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 일단 손가락으로 한 번에 스크롤할 수 없어서 훑어보기가 잘 안된다는 점, 댓글창이 없어서 보다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점 등이 있다. 시끄럽지 않고 온전히 내 기분에 집중해 좋다.
남의 의견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근데 우린 잘 모르는 남의 말에 연연한다. 가슴에 콕콕 더 와 닿는다. 나의 경우에는 내 생각도 아직 정리가 안되었을 때 특히 그렇다. 그럴 때는 보고 있던 댓글창을 닫아보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잠시 음소거 하기. 그리고 내게 묻자. ‘난’ 어떻게 생각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