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다다르면 얼큰한 국물과 매운 음식이 마구마구 당긴다. 당기는 걸 넘어서 '땡긴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뜨겁고 칼칼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속을 시원하게 훑어주면 그 순간은 모든 힘듦이 사그라든다. 이런 내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대체 어떻게 속을 풀었던 걸까.
도쿄 외곽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나는 한 층에 다섯 가구쯤 살았던 2층짜리 아파트(일본에서는 우리처럼 높은 건물의 아파트를 맨션이라 부르고 낮은 건물을 아파트라 한다.)에 살았다. 물론 그 아파트에 사는 외국인은 나 혼자였고, 그 때문에 음식을 해 먹을 땐 무엇보다 조심했다. 김치며 된장이며 냄새가 강한 재료로는 요리하기가 힘들었다. 김치찌개도 그리웠고 고춧가루 팍팍 뿌린 된장찌개도 생각났다. 하지만 만들지 못하니 먹지 못하고, 못 먹는 만큼 내 입맛은 그곳에 젖어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본 음식은 담백하고 조용하다. '나야 나!'라고 외친다기보다, 살짝 손을 들어 존재를 알리는 듯하다. 그래도 그것은 자신을 알리기 충분하다. 그런 음식 중, 날 조용히 달래줄 수 있던 것이 바로 味噌汁(일본 된장국)였다.
絹ごし豆腐(키누고시두부・표면이 매끈한 두부)를 작게 썰어두고, 가장 먹기 만만한 건조미역을 물에 잘 불려둔다. 뜨거운 국물에 바로 얹을 파도 얇게 송송 썰어 준비. 간편한 육수팩을 끓는 물에 퐁당 넣고 몇 분 두면 감칠맛 나는 향이 풍겨온다. 육수팩을 빼내고 불려놓은 미역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넣어 끓인다. 미역이 보들보들 해 질 무렵, 두부를 넣어서 조금 더 끓여본다. 그리고 불을 끈 뒤 味噌(미소・일본 된장)를 두어 큰 술 넣고 잘 풀어준다. 일본의 된장국은 된장을 넣어 팔팔 끓인다기보다 된장을 풀어 마시는 국물이라고 한다. 된장이 보기 좋게 풀어져 부드러운 색이 되었을 때, 국그릇에 담고 그 위에 송송 썬 파도 조금 올린다. 따뜻한 국물에 파를 적시면 알싸하게 올라오는 향긋함이 후각을 자극한다.
얼른 후루룩 마시면 적당히 따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으허~ 시원하다!'의 감탄사를 일으키는 맛은 아닐지라도 힘든 나의 마음을 달래준다. 땀이 쪽 빠지는 얼큰함은 아니지만 따뜻함이 있다.
일본 가정식을 먹는다 하면 꼭 마주하는 것이 바로 味噌汁(일본 된장국)다. 소박하고 단출한 국물이지만 어떤 음식과도 함께할 수 있는 맛이다. 별 거 아닌 부드러움에 다정함을 느끼고 마음이 놓인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없으면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같이 성질을 내며 속을 풀어주는 친구는 아니지만, 맞장구 정도 쳐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를 사귀게 되어 참 다행이다. 오래토록 함께하자는 따뜻한 맛에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