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도 건조한 입술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 습관처럼 입술을 뜯는 내게 "또, 또! 입술!" 하는 꾸지람이 자주 들렸다.도깨비풀 같은 각질은 겨우내 나를 괴롭혔다. 선물 받은 유명 브랜드의 립밤 몇 가지를 열심히 발랐지만 소용없었다. 입술에 도포 한 립밤이 증발함과 동시에 까슬까슬한 각질이 다시 고개를 내밀 뿐. 세수할 때 따뜻한 물에 입술을 불린 후 각질을 관리하고 보습에 신경 써도 효과는 글쎄?
건조한 겨울철에 부드러운 입술을 되찾는 방법은 딱 두 가지였다. 신경 쓰이는 각질을 전부 손으로 뜯어내 버리거나, 특정 제품을 듬뿍 바르고 자거나. 전자의 방법은 일시적으로만 효과가 있을 뿐 피를 보기 일쑤였다. 후자의 특정 제품은 유통기한이 무려 일 년이 지난 터라 바를 때마다 영 찜찜했다. 날짜 지난 화장품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발랐다. '냄새가 변한 것 같은데. 킁킁.'
남들은 립밤 없이도 잘만 살던데 어째서 나는 입술마저 약골인지. 찬 바람이 불면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건조하던 내 입술은 이내 갈라지고 터지기 시작했다. 립밤이 아니라 연고를 발라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는 여자라고. 올 겨울 립밤 구매란 내 사전에 없다며 이상한 고집을 피우며 버티고 버텼다.
고요한 겨울밤 남편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어? 입술이 왜 그래?"
"이걸 이제 봤어?"
"응. 이제야 봤네. 아프겠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왼쪽 입가에 난 상처 이야기를 들었었다. 무려 일주일 동안 피가 나고 딱지가 앉았었건만나의 동거인은 정녕 몰랐단 말인가. 상처에 부지런히 연고를 발랐지만 쉽사리 낫지 않았다. 백화점 제품도, 연고도 통하지 않는 몹쓸 입술을 어찌하리오.
드디어 봄이 왔다. 봄이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봄비가 내리던 날 내 입술에는 또 벌건 피가 고였다. 젠장. 사 개월을 미련하게 버텼건만 완패였다. 겨울이 다 지나고 결국구매한 제품은 '라네즈 립 슬리핑 마스크'였다. 이번에도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더는 선택지가 없었다.
기존엔 딸기 향의 분홍색 베리 제품을 사용했었다. 이번엔 애플라임 향이 나는 연두색 제품을 구매했다. '진작 샀으면 좋았을 걸.'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연초록 색상의 립밤을 듬뿍 바르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보들보들 촉촉한 새 입술이 나를 맞았다. 여태 참아 온 나날들이 무색할 만큼 매끈해진 입술이 내게 물었다. '입술 각질 그게 뭐예요?'
이제 내게 입술이 왜 그러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부비부비 비벼 보고, 음파 음파 입술을 부딪쳐 봐도 거슬리는 각질이 전혀 없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오래 불편을 참아 왔단 말인가. 매일 밤 입술과 화해하는 마음으로 립 슬리핑 마스크를 도톰하게 펴 바른다. 코끝에 스치는 사과 향을 느끼며 생각한다. 나를 위한 적은 소비에 인색하지말자고.
이 제품을 알게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제부였다. 겨울철에 제부가 립 제품 두 개를 사서 나와 여동생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그해 처음으로 입술의 고통에서 해방된 겨울을 보냈었다. 제품을 구입하자마자 절반을 소분하여 소독한 공병에 담았다. 절반의 몫은 여동생에게 돌아갔다.
해당 제품이 특별히 내게 잘 맞는 것인지, 제품력이 우수한 것인지 모르겠다만. 다른 다양한 제품을 사용해 봐도 차도가 없던 내겐 구원템이다. 물건 그리고 사람,이처럼 내게 특별히 잘 맞고 유익한 존재들이 있다.
자꾸만 손이 가는 가방, 피부가 먼저 아는 화장품,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쉼이 되는 친구. 일당백을 해내는 든든하고 고마운 대상이다.
초록색 지폐 두 장을 지불하고 내 입술에 뒤늦은 봄이 찾아왔다. 화장대에 앉아 보드라운 입술에 화사함을 입힌다. 마음까지 활짝 피어나는 봄이 열린다.
소유주 의견:
자고로 화장품은 세일할 때 사야 제맛. 다음 겨울에는 너무 늦지 않게 사는 걸로.
미니멀라이프, 절약, 봄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기회비용만 잔뜩 지불했다. (내돈내산, 광고 1도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