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브런치 작가가 되었을 무렵 작가 활동 지원금을 받았다. 귀한 돈을 하사한 주체는 제부와 여동생이었다. 작가 지원금의 사용 조건은 이러했다. 작가 활동과 관련된 물건을 살 것. 글 수정이 용이한 태블릿 피시를 살까 독서하기 편한 e북리더기를 살까 고민한 끝에 후자로 결정했다. 시간 날 때마다 핸드폰으로 전자책을 읽었던 터라 e북리더기가 생기면 어마어마하게 자주 쓸 줄 알았다. 온전히 독서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기라니. 이 얼마나 유용한가. 전자 잉크 덕분에 눈이 훨씬 편안하다는 조건이 특히 나를 유혹했다. e북리더기 구매에 필요한 나머지 돈은 남편의 지갑에서 나왔다. 온 가족이 나의 글쓰기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니 행복했다.
23년 4월. 아직 출시되지도 않은 기기를 사전 예약 한 건 오랜만이었다. 내가 고른 제품은 '크레마 모티프 화이트'였다. 워낙에 종이책의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e북리더기는 생경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막상 갖고 싶다는 마음을 품으니 바람은 점점 간절함으로 부풀어 올랐다. e북리더기에 관한 다양한 후기를 읽으며 오매불망 기다렸다. e북리더기는 배터리, 빛 번짐, 잔상 현상 등의 논점이 많은 제품인지라 뽑기 운이 따르길 바랄 뿐이었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최신상 e리더기가 집 앞에 당도했다. 제품 상자가 문 앞에 쿵 던져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얼른 대문을 열었다. 빨간색 취급 주의 스티커가 붙은 작은 상자가 보였다. 귀한 녀석이 주인의 품에 오기도 전에 엉덩방아를 찧다니. 반년은 족히 기다린 듯한 기분이었다. 상자를 개봉하니 e북리더기가 뽀얗고 하얀 자태를 드러냈다. 모양이며 색깔이며 어찌나 예쁜지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냥 평범하게 네모진 모양에 흔한 흰색임.)
조심스레 액정 보호 필름을 붙이고 미리 구매해 뒀던 보호기도 씌웠다. 전자제품을 완전히 충전한 후에 드디어 전원을 켰다. e북리더기는 액정이 잘 깨지는 편이기에 그 길로 푹신한 파우치까지 구매하러 나섰다.
투명 보호기 안쪽에는 귀여운 엽서와 스티커까지 넣어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나만의 e북리더기가 탄생했다. 기기를 독서대에 올려놓고 다운로드 한 전자책을 펼쳤다. 책 장을 넘길 때마다 독서대의 클립을 따로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편리했다. 새 기기를 개봉박두한 첫 주에 전자책 세 권을 내리읽었다. 그러고 나서...... 나의 e북리더기는 책꽂이 안에 방치된 채로 깊은 겨울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아끼면 뭐 된다는 말은 언제나 틀리지 않다. 해외여행 갈 때 귀한 몸 부서 뜨릴까 봐 못 챙겨. 짐 많은 가방 속에서 혹여 뭉개질까 집에 고이 모셔 둬. 그러다 보니 한 계절이 휘리릭 지났다. 가방에 넣은 상태로 살짝 떨어뜨렸는데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는 후기를 보고 잔뜩 겁을 먹은 게 강제 겨울잠의 원인이었다. 나의 새삥 기기는 푹신한 파우치를 이불로 덮고 숱한 이야기와 함께 동면했다.
이럴 거면 태블릿 PC를 사지 그랬냐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살짝 마음이 동했지만 둘은 별개의 영역이란 말이지. 어쨌거나 구매를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종이책의 감성과 즉흥성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e북리더기와 함께라면 어디든도서관이 된다. 한 손안에 도서관이 쏙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하다.
얼마 전에 떠났던 여행지에서 444쪽에 달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핸드폰으로 정독했다. 비행기 탑승 시점부터 e북리더기를 챙기지 않은 나 자신을 책망했다. 뜨거워진 폰과 충혈된 눈을 비비며 e북리더기의 필요성을 절절히 체감했다.
크레마 모티프를 샀던 계절인풋풋한 봄이 왔다. 독서하기 좋은 계절인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낄 만큼 아꼈으니 이젠 기기가 닳도록 열심히 사용해 보련다. 전국 팔도, 해외 어디든 e북리더기를 옆구리에 끼고서 나만의 도서관을 개장할 셈이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기기의 전원을 켰다. 방전 됐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배터리가 무려 62%나 남아 있었다. 내 마음도 충전되는 기분이다. 앞으로 마음껏 사용하라는 신호 같기도 하고.
전자책 읽기를 통해 다양한 창작의 모티프를 얻어야지.그나저나 가족들이 선물한 만년필과 e북리더기는 본연의 역할보단 CCTV 역할을 월등히 잘하는 듯하다. 글을 쓰지 않은 날이면 기기의 액정이 번쩍일 때마다 괜히 흠칫한다. '아. 얼른 글 써야 하는데.'글쓰기의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이다.
처음 브런치 작가가 됐을 때의 기쁨과 함께 내게 온 e북리더기. 브런치 작가가 되고 전자책 출판 제안도 받았다. 이 작은 기기에는 가족들의 격려와 나의 부푼 꿈이 실려 있다.
전자 잉크의 잔상 현상과 느린 속도 때문에 늘 종이책에 손이 먼저 가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나의 e북리더기는 특별하다. 손안에 작은 도서관 하나 짊어지고 어디든 떠나고 싶게 만드는 녀석. 190그램의 작은 몸 안에 수많은 장서를 품은 그의 지적 매력만큼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소유주 의견:
책의 삽화와 그림을 오직 흑백으로만 감상할 수 있어서 아쉽다. 잔상 때문에 만화책을 편하게 볼 수 없는 점 또한 아쉽다. 액정 빛부심도 아쉽고... 아악. 아쉬운 소리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