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빅찹에 도전해야지.' 몇 달을 벼르다가 미용실로 향했다. 빅찹(Big Chop)은 자연 그대로의 머리카락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어깨를 덮는 웨이브 헤어를 모두 자르면 기장이 꽤나 짧아지겠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편이고 찰랑거리는 머릿결도 갖게 될 생각에 모처럼 설렜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집 근처 미용실을 방문했다. "예약이 꽉 차서 오늘은 안 돼요." 도로 집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다른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미용실에는 손님이 딱 한 명 있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소파에 앉아 챙겨간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이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명할 길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냥 나중에 다시 온다고 할까.' 그때였다. 나를 친절하게 부르는 사장님의 목소리. "아가씨. 이쪽으로 앉아요." 아가씨? 호호. 단 세 글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사장님께 고분고분머리를 맡겼다.
올해 들어 세 번째 자르는 머리카락. 아무런 계획도 예약도 없이 헤어 변신을 했던지라 때마다 각각 다른 미용실을 이용했다. 앞서 만났던 원장님들은 왜 이리도 예쁜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하느냐, 꼭 잘라야겠느냐는 질문을 하셨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중년의 사장님께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목소리로 멋진 변신을 예고하셨다. "손질 쉽게 묶어도 풀어도 자연스러운 머리로 잘라 줄게요." 사십 년 동안 미용을 업으로 삼으셨다는 사장님이었기에 믿음이 팍팍 갔다. 세심한 설명과 상담까지 곁들여 가며 머리카락을 잘라 주시니 '여기로 오길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걱서걱. 사장님의 과감한 가위질에 의해 세팅 파마가 돼 있던 머리카락이 모두 다 잘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장이 두 배 이상 줄어든 머리칼을 갖게 됐다. 빅찹에 성공한 나는 잔잔한 미소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뀐 모습이 꽤나 시원해 보이고 괜찮았다. "예쁘네요. 뒤쪽 머리카락도 확인해 보세요." 사장님은 크고 둥근 거울을 들어 뒤통수까지 세심하게 확인시켜 주셨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왔다.
문득 궁금했다. 머리를 감으면 스타일이 조금 달라지겠지? 기장은 그대로일까? 빅찹 기념으로 샴푸가 아닌 비누로 머리를 감고 다이슨 드라이기로 후다닥 말렸다. 머리 손질 시간이 확실히 줄어들어 더욱 만족스러웠다. 자! 바뀐 헤어를 다시 감상해 볼까?
우엑. 이게 뭐야!?
십 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거울 속에 박혀 있었다. 쥐가 파먹은 듯한 층 머리에 세련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년이 헤어 스타일이라니. 놀란 가슴을 가다듬고 다시 빗질을 하고, 머리를 묶었다가 풀어도 보고, 모자도 썼다 벗었다 별짓을 다 해 보았으나 수습 불가였다.
망. 폭망.
그날 나는 잠들기 전까지 변신한 헤어를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긴 머리를 좋아하는 그에게 차마 정년이로 변한 헤어를 보여줄 수 없었다. 무려 삼일 동안 머리를 꽁꽁 동여맨 채로 살았다. 성경 속에 나오는 삼손이 된 기분이었다.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내 머리는 밀렸고 아름다움은 떠나갔고 사기는 꺾여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먼저 동생들과 엄마께 바뀐 스타일을 공개했다. "어때? 내 머리 정년이 같지?" 모두 입을 모아 감탄을 쏟아부었다. "헉. 세상에. 어떡하냐?", "어쩌다 그 지경이 됐어? 머리를 쥐가 파 먹은 것처럼 잘라 놨네.", "왜 그런 데 가서 머리를 자르고 그래?" 별별 타박을 들은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고 곰곰이 따져보았다.
마른 머리카락 상태에서 물을 충분히 묻히지 않고 가위질을 했으니 층이 삐뚤빼뚤 이상하게 날 수밖에. 나 또한 이를 직감했기에 집에 오자마자 머리를 감았던 것이리라. 가족들은 내 헤어 스타일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나 되니까 이런 머리도 소화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속이 쓰라렸다.
이제 남편만 내 머리카락을 확인하면 된다. 나는 드디어 비밀처럼 묶어 둔 머리칼을 풀어헤치고서 그의 앞에 섰다. 그는 나를 보고, 또 봤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바뀐 헤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여보. 나 바뀐 거 없어?"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뭐 했어? 화장을 바꾼 건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냐... "아니. 나 지금 민낯인데." 남편은 눈을 크게 뜨더니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 샀어?" 그의 눈썰미에 두 손 두 발을 든 나는 "뭐야. 머리 확 잘랐잖아." 하며 정답을 발설했다. "아! 어쩐지~. 뭐가 바뀌었다 했다. 잘했네." 어쩐지 뭔가 바뀐 듯했다는 둥, 잘했다는 둥. 아내의 망한 머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편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거짓말처럼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 가는 건 시간이요, 자라는 건 머리카락이구나 새삼 진리를 곱씹는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길 손꼽아 기다리던 사춘기 시절의 내가 생각난다.그땐 다달이 미용실을 다니며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을 불태웠는데. 나이가 드니 첫째로 중요한 건 머리숱과 머릿결이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실력 있는 미용사를 만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장님께 했던 다음에 또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영영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아가씨 소리가 아무리 듣고 싶어도 못 가요. 머리 자르고 아저씨 될 뻔했거든요.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