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가: 6천 원, 감정가: 만 원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발도장을 찍는 장소가 있다. 간식거리와 문구류를 모아 놓고 파는 작은 상점인데 나는 그곳을 '동심 상점'이라 부른다. 귀여운 잡동사니에 잡생각이 씻겨 내려감과 동시에 마음의 나이까지 한 뼘 줄어드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곳이다. 한적한 시간대에 아기자기한 물건이 가득한 매대를 구경하고 있으면 훌쩍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 든다.
평화로운 여름의 끝자락. 잦아드는 매미소리를 아쉬워하며 동심 상점을 방문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투박하고 의문스러운 나무 상자들이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연주해 보세요." 건전지도 없는데 이렇게 작은 상자가 연주를 한다고? 나무 뚜껑을 젖히고 얇은 쇠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려 보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글을 쓸 때마다 듣는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감탄하며 여러 차례 손잡이를 돌리고 돌리고.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가격은 단 돈 육천 원!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니멀라이프를 향한 갈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인가? 아니오.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인가? 아니오.
이러쿵저러쿵 자문자답을 한 끝에 빈 손으로 가게를 나왔다. '귀여운 건 독이야. 그만 좀 사자.' 스스로를 타박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간절히 나무 오르골이 생각나는 게 아닌가.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인가? 예스.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인가? 예스.
그 길로 다시 동심 상점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벌써 여러 사람들이 오르골을 만졌는지 상자는 마구잡이로 뒤집어져 있고 뚜껑도 열려 있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냉장고 유리문 위에 앉아 육두문자를 섞어 가며 거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살 걸 그랬다.' 서둘러 결제를 하고 나오는데 자영업자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헤아려졌다. 남의 가게 냉장고 위에 앉아 앉아 부잡하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사장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무인 상점의 CCTV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면하고 싶은 광경들이 찍히겠구나. 내 손에 들린 오르골의 무게가 처음과는 달리 부쩍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오르골에는 영 손이 가지 않았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구입한 오르골인데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왜일까. 거실의 가구 위에 나란히 놓인 오르골 두 개. 오랜 시간 덩그러니 방치될 거라 예상했는데 대 반전이 일어났다. 매일 밤 남편이 오르골을 연주하며 혼자 보기 아까운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며 거실을 굴러다녔다. 그 광경이 재밌는 남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내가 웃다 지칠 때까지 엉터리 오르골 공연을 선보였다.
"와.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깔깔." 아내의 웃음소리에 음악의 선율이 묻히고 집엔 활기가 돌았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구매한 오르골은 평안을 넘어 마르지 않는 웃음을 선물했다. 이제 작은 손잡이를 돌리면 지브리 OST와 함께 재밌는 추억이 흘러나온다. 글 쓰는 이가 바라던 물건이 주는 영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남편 왈: 다음에 가면 다른 오르골도 사 와야겠다. (진지)
나: 이걸 또 사겠다고? 하하하. 깔깔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