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때문에 구매했던 에어팟 프로 2는 자그마치 팔 년 동안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 주었다. 윗집 사람들의 요란한 소음 아래 놓였을 때나 비행기 안에서 이름 모를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 때에도 에어팟의 노이즈캔슬링 기능만 있으면 무적의 이너피스를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듣는 건 누구에게나 고문이겠지만 청력이 소머즈 급인 내게 소음은 귀신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이다. 지나친 소음은 때때로 마음의 피로를 넘어 불안정을 몰고 오기도 한다.
오랜 기간 사용했던 에어팟 기기에는 숱한 추억과 애환이 묻어 있다. 날이 저물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다. 버스 안에서부터 끼고 있던 에어팟을 그대로 착용한 채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반가운 뒷모습을 발견하시고 신나게 딸의 이름을 부르셨다고 한다. 노이즈캔슬링의 세계에 빠진 내겐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부모님께선 내가 일부러 못 듣는 척 장난하는 줄로 아시고 온갖 별명을 소문내며 앞서가는 딸의 뒤를 따라오셨단다. 큰딸아. 어이. 자두 언니. 야 이 멍청아. 가까스로 나를 따라잡으신 부모님은 노이즈캔슬링의 성능에 놀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그거 너무 위험하다. 길 다닐 때 절대로 사용하지 마라. 너 그러다가 큰일 난다!" 엄마 아빠의 질려버린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 했다.
대중교통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아파트 내 인테리어 공사, 자정 넘어 발망치를 찍으며 청소하는 이웃. 지독한 위기의 순간마다 나와 함께했던 에어팟이 최근에 명예퇴직을 운운했다. "지지직. 파박. 퍽." 몇 달 전부터 간헐적으로 들리던 이상한 소리는 점점 더 잦아졌다.
귀에 막 꽂았을 때라든지 달리기를 할 때는 물론 손만 스쳐도 잡음을 내는 기기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딱히 사고 싶지도 않은 기기를 삼십만 원이 훌쩍 넘는 거금을 주고 재구매해야 한다니. 기기 욕심이 전혀 없는 내게 새로운 에어팟을 사는 행위는 욕구가 아닌 그저 의무의 영역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야만 하는 노이즈캔슬링 콩나물.
최근 사무실에서 비속어를 자주 내뱉는 직원 때문에 귀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고 에어팟의 지지직 소리까지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사 줄게." 하는 남편에게 "나 이제 돈 버는 여자야. 같이 가기만 해 줘."라고 답했다. 근처 쇼핑몰으로 직진하여 에어팟 프로 쓰리를 구매했다. "고객님. 일시불인가요. 할부인가요?" "일시불이요."
성능이 한층 더 좋아진 기기를 손에 넣었지만 전혀 기쁘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 수납장 어디엔가 새삥을 넣어두고 바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습관처럼 이전에 쓰던 기기를 챙겨서 출근했다.
그런데 아뿔싸. 몇 달 동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첫째 녀석이 너무나도 쌩쌩하게 잘만 작동하는 게 아닌가. 어라? 툭툭 건드려도 보고 흔들흔들 머리도 움직여 보고 우당탕 달려도 봤는데. 어째서인지 잡음 하나 없이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듯이 새것 흉내를 냈다. 졸지에 에어팟이 두 개 생긴 나는 충전 유무에 따라 프로 투와 프로 쓰리를 번갈아가며 사용 중이다.
이팔. 사팔. 십 더하기 팔. 사무실에서 어울리지 않는 쌍욕 소리가 들리거든 신속하고 우아하게 에어팟을 꺼내 든다. 빌런 잠시 나가 주실게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세상에 빌런은 많고 따라서 강력한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필요한 순간도 많다. 어찌 됐든 구매하길 잘했다고 나를 위로하며 다음 월급날을 기다린다. 노이즈 캔슬링이여.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나를 엄호하라. 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