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에 담긴 시간의 기억
밤 8시에야 산책을 나갔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2단지, 그 옆으로 3단지가 있다.
어제, 오늘 이 외곽을 세 번 정도 돌았다.
4단지까지 있는 이 아파트에서 3단지가 가장 인기가 좋다고 한다.
단지마다 특색이 있지만 그런 말을 들어서인지 잘 꾸며진 것 같았다.
3단지 가장 큰 평형에 사는 한 가족이 떠올랐다.
전에 우리 교회를 다녔던 이들이다.
두어 달 전에 우연히 만났는데 3단지로 이사 왔다고 했다.
깜짝 반가웠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한참 젊은 사람들이라 너나들이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교회일에 열심인 엄마랑은 잘 지낸 편이다.
언젠가 엄마가 그 가족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럴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다."
"뭐가?"
"목사님이 그 집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걱정하길래
쌀 포대를 보냈는데 가타부타 말이 없네."
엥?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요즘 세상에 쌀을 보내는 게 어딨어?"
엄마는 엄마대로 눈이 둥그레졌다.
"쌀이 최고지, 너희들 키울 때 쌀 한 포대 떡하니 갖다 놓으면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아나?"
"요즘 젊은이들이 누가 쌀을 그리 생각해?
얼마나 어이없고 자존심 상했을 거야."
그래도 엄마는 납득이 안 되는 눈치였다.
"목사님이 많이 걱정했는데."
"형편이 나빠졌다고 해도 그이들 사는 기준에서 그렇다는 거지.
내 보기에는 엄마 형편이 더 안 좋거든?"
잘한다고 한 일을 못했다고 잔소리까지 들으니까 엄마는 의기소침했다.
그래도 단정한 젊은이라 그다음 주 엄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3단지를 지나가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신축 아파트 큰 평형으로 이사 와서 내 마음까지 푸근했던 건 사실이다.
사진: 이영환 작가
우리 단지 앞에 한때 잘나가던 생선구이집이 있다.
우리가 입주하기 전에는 소문난 맛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의 여파로 문을 닫은 후 이 년 넘게 비어있었다.
어느 날 그 가게 담장을 빙 둘러서 누가 꽃을 심어놨다.
그 꽃밭은 가게와 붙어있는 교회 담장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생선가게가 다시 문을 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생선가게 앞에 안내문이 붙었다.
교회 학교에서 떡볶이 행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교회에서 그 가게를 인수해서 비전센터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봄에는 작은 꽃모종들이 옹기종기 피어났던 담장으로
맨드라미, 분꽃, 접시꽃 등이 키를 키우고 있었다.
교회 학교에 가서 떡볶이를 얻어먹고 싶었다.
그 소릴 했다가 한마디 듣고는 가지 않았지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
담장의 꽃처럼 이쁜 학생들이 많이 많이 모여서
행사를 풍성하게 잘 치르길 바랐다.
생선구이집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아 좋았다.
내 친구 강남옥 시인은 '쌀과 꽃'이란 시를 썼다.
세 번째 시집 <그냥 가라 했다>에 실린 시다.
그녀는 수십 년 전 도미해서 지금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살고 있다.
한국 사람 집에 초대받으면
캘리포니아 무논에서 서부 스타일로 출렁댔을
40파운드짜리 '이천 쌀'이나 '경기미' 같은
쌀 한 포대를 사 간다
난데없는 쌀 포대 사이에 두고 서로 웃다가도
먹는 일은 우습지 않다
밥 많이 안 해 먹는 집이라면
일 년도 버틸 가득한 양식
수챗구멍에 흘린 쌀 한 톨
홍수에 떠내려가는 자식 건져내듯 건져내던
.
.
.
쌀 포대는 크고 무겁고
꽃다발은 작고 가볍지만
값은 같다
황량한 어느 겨울
대학생이던 우리는 어느 대학 캠퍼스 노천강당
한구석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강남옥은 작은데 소리통이 커서 노래를 잘했다.
나는 작으면서 소리 통까지 작아서 노래를 못한다.
남옥에게 한참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왜 그리 못하냐고 혼나가면서 배웠는데.
추워서 벌벌 떨면서 배운 노래가... 생각이 안 난다.ㅠ
쌀도 꽃도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상징이다.
평생 꽃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온 엄마의 쌀 이야기다.
오늘따라 그리운 강남옥은 밥 대신 빵을 뜯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