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김장생 신인문학상 수상작
그가 달궈진 차 문을 열고 에어컨을 켜서 열기를 식히고 있을 때 불쑥 중이가 나타났다. 그러잖아도 찔레 사료를 주려던 참이었다.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인지 아이 편에서 먼저 인사를 했다. 푸른색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을 한 중이 손에는 핸드폰만 들려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탓하듯 물었다.
“또 찔레만 혼자 뒀냐?”
“뭉치라니까, 왜 자꾸 남의 개 이름은 바꾸고 그러세요?”
“아무튼.”
“네, 네. 내가 알아서 해요. 근데 할아버지, 지금 초원에 가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거기서 맨날 밥 사 먹는 거 봤거든요. 저 좀 태워주면 안 돼요? 그 근방에 학원이 있어서요.”
그러면 그렇지, 먼저 인사할 때 알아봤다. 잘못하면 이 아이가 지지지지 떠드는 소릴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재바르게 조수석에 오른 중이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쫑알거렸다.
“할머니는 우리 뭉치 싫어했는데, 할아버지는 왜 자꾸 관심이세요? 귀찮게.”
“할머니가 찔레를 알았단 말이냐?”
그것도 몰랐냐는 듯, 중이가 맹랑하게 한숨을 뱉으면서 잘래잘래 고개를 흔들었다. 아내가 찔레를 알았다고? 싫어했다고?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가 없으니 그 존재의 무게가 깊고 확실하다. 평생 같이 산 아내의 취향을 앞집 아이한테 듣다니, 아내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이제야 안다. 아침나절만 해도 그랬다. 눅눅한 곰팡내 때문에 코가 아렸다.
이 집이 언제부터 이런 곰팡내를 풍겼지?
그는 새삼 방안을 둘러보았다. 대체 아내는 뭔가? 아내가 없으니 곰팡내가 나고 아내가 없으니 벽지가 누렇게 바래고 아내가 없으니 세상의 크고 작은 것들이 죽일 듯 그를 덮친다. 아내가 없는 시간은 서리 맞은 들국화처럼 처량하고 낯선 천국처럼 지루하다. 아니, 당장에는 밥이나 먹겠다고 이리 무겁게 휘감기는 빛살 벽을 저 아이와 뚫고 있지 않은가.
“점심은 먹었냐?”
차에서 내리고서도 머뭇대는 아이한테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중이를 앞세우고 초원으로 들어갔다. 집밥을 먹고 싶을 때 오는 곳이다. 주말 점심시간의 식당은 사람들로 왁자했다. 소란이 싫어서 그만 나가 버릴까, 싶으면서도 그는 어정쩡, 종업원을 따라갔다. 채 치워지지 않은 식탁 옆에 서서 갑오징어 볶음을 시켰다. 미역국이 딸려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맵지 않게 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중이는 핸드폰에 골몰했고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햇발이 다글다글 끓고 있는 정원이 보였다. 자잘한 자갈이 가득 깔린 마당에 몇 그루의 나무가 짙푸른 이파리들을 번들거리며 서 있다. 그 나무들이 어느 순간 나목이 된다는 사실이 그를 아프게 짓눌렀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다.”
이름도 모르는 앞집 아이한테. 그 이름, 물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중이인 아이가 아,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큰아들네가 손자를 앞장세우고 들어오기에 저들 엄마 생일이라고 오는 줄 알았다. 작은아들과 결혼할 예비 며느리가 인사드린다며 온 것을 보고도 꼭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아들이 셋이라고 놀려대던 아내의 농이 그의 가슴을 지그시 지르밟았다.
말로만 듣다가 처음 만난 아가씨는 키도, 덩치도, 눈망울도 컸다. 아내가 있었으면 시원스럽게 생겼다고 좋아했을까. 그는 아내가 끓여주던, 들깻가루를 넉넉하게 넣어 뭉근하게 끓인 미역국이 생각났다. 배달 음식으로 차려진 식탁을 보면서 목이 막혀 남몰래 가슴을 두들겼다. 애처럼 음식 하나에 서러운 강물이 넘실댔다. 아들과 둘이 살면서 집밥을 바치는 것처럼 소갈머리 없는 짓이 또 있을까만 오늘은 아내 생일 아닌가. 작은아들이 불쑥 말했다.
“아버지, 저희요. 입주할 아파트 보러 가요. 형수님도 궁금해하고. 나간 김에 바람도 좀 쐬고 그럴게요.”
니들 엄마 없다고 그새 생일도 잊었냐, 그는 말하지 않았다. 생일은 살아있는 자의 날이니까. 생전에도 직장 생활하는 자식 며느리들은 주말 같은 때 앞당겨 다녀가곤 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정확히 모르던 생일날을 지금 기억할 리가.
큰며느리의 명랑한 목소리가 작은아들을 향했다.
“입주할 아파트는 몇 평이죠? 전세에요? 자가에요?”
“자가라고 들었어요.”
못을 박듯, 예비 며느리가 재바르게 말했다.
“아, 소형이에요.”
작은아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얼버무렸다. 생전 그와 눈 같은 거 맞추지 않는 큰며느리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같이 산 자식이라고 시동생 주머니로 돈이 더 들어갈까 궁금하겠지. 아파트 분양이니, 시세니 떠들어대는 수다를 뒤로 하고 그는 안방으로 들어와 벽에 기대앉았다.
누가 그랬던가. 그 집을 지은 건축가라고 할지라도 그가 만든 것은 절반이라고. 나머지는 그 집에서 살게 될 사람이 만들고 채워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집은 누구 걸까.
점포 두 개를 아래층에 두고 그 위에 살림집을 올린 멋없는 이층집이었지만 처음 이사 왔던 날, 웃음 헤픈 아내는 또 얼마나 웃었던가. 모과나무와 석류나무를 품고 아내와 같이 늙어가던 집, 아내의 얼굴에 번지던 기미처럼 곰팡이를 안고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는 집, 꽃맺이가 떨어지면 찬바람을 부르다가도 꽃향기에 다시 햇살이 뛰어놀던 집, 아들 둘 잘 커서 제 몫 할 때까지 아내 혼자 건사하면서 세월을 쌓아온 집, 같이 대출금 갚아나가자고 사내아이들 들쳐업고 어디서 일거리를 잘도 찾아와 썩썩 쳐내던 아내.
“이제 이 집은 처분하시고 편하게 아파트로 가세요. 혼자 지내시기에는 너무 크고 낡았어요.”
모과나무에 매달려 몸통을 키우던 아들은 곧 분가할 것이다. 집 팔아 일부를 떼어주고 작은 집을 얻어 혼자 살 생각이긴 했지만, 아들 편에서도 행여 같이 살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혹시 그러자고 하면 어쩐다, 오줄없이 혼자 궁리했던 게 민망했다. 자기만의 꿈꾸는 집이 있을 것이다. 퇴근한 후에도 어슬렁거리다 겨우 잠만 자러 들어오는 아들, 사내 둘의 침묵을 감당해야 하는 집은 언제나 어느 한 곳이 버성겨서 삐거덕, 소리를 내곤 했다. 그는 아내가 죽은 이 집에서 살다가 죽고 싶었다. 어느 순간 홀연 이 안방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참 좋겠다. 그래 놓고 미역국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