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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Dec 26. 2022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시킨

초등학교 담장 옆에 이발소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시절. 여자는 미용실, 남자는 이발소라는 이분법적 개념도 없을 만치 어릴 때였다. 이발소에 이끌려 가면 높다란 회장님 의자가 있고 키가 작은 어린아이는 나무 빨래판을 팔걸이 양쪽에 걸치고 그 위에 앉혔다. 그리고 가위로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다. 머리는 몽실 언니 단발이었다. 취향 같은 걸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머리를 자르면서 이발소 벽을 둘러보면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 같은 그림이 있고. 수채화 바탕에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의 시가 붓글씨 체로 쓰인 액자가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것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그리고 또 지나간 것은

항상 그리워지는 법이니


라는 시였다.

그 시를 읽은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였고 또래보다 훨씬 작은 아이였는데 이상하게 시가 마음에 와닿았다. 키와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비례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힘든 일은 삶이 나를 속이는 것이로구나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세상에 슬프거나 화나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구나. 다른 사람도 그러므로 이렇게 벽에까지 써서 붙여 놓은 거겠지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것


언제나 슬프고 괴롭다고?

세상엔 참 힘든 사람이 많구나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나도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또 지나간 것은

항상 그리워지는 것......


힘든 시간이 그리워진다고? 그럴 리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불편한 의자에서 왠지 힘들고 고달픈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취향 같은 것을 묻지 않는 이에게 내 머리카락을 내어주고 있는 상황. 푸시킨의 시는 그런 상황에 있는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던 듯하다.


세상이란 불안하고 슬프나 그 속을 헤치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는 사람들 같다.


나고 자란 동네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한두 해 전 출근길에 어릴 때 이발소를 했던 할머니가 아침 산책을 하는 것을 보았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여 세월이 흘렀지만 턱이 크고 남자처럼 체구가 큰 할머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아득한 그리움을 느꼈다. 푸시킨이 말한 대로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 그리움의 정확한 대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이발소 아주머니를 '소사댁'이라 부르며 길에서 만나면 잡담을 주고받던 엄마.

엄마는 다니던 주간보호센터를 못 나가시고 닷새를 집에 누워계셨다. 내가 연휴를 마치고 부랴부랴 출근한 다음날 먼저 가신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아버지와 길이 어긋나지 않아 두 분이 잘 만나셨는지 궁금하지만 답을 알려주는 이가 없다.


'소사댁' 할머니 동네는 일 년 전 재개발이 되어 근처 동네를 뒤져도 그 할머니를 찾을 길은 없을 것이다. 나를 모르는 아주머니 또는 할머니를 굳이 찾을 이유도 없다. 학교 근처 문구점 주인은 학교 아이들이 전부 알아보지만 문구점 주인이 전교생을 알아볼 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꽃이 피었다 비 온 후 제멋대로 떨어져 여기저기 흩어지듯 인연도 만났다 구름이 흩어지듯 사라진다. 스님은 울면 조상이 마음 편히 떠나지 못한다고 꾸짖지만 울고 싶으면 그냥 운다. 엄마는 그렇게 판단력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그냥 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은 오리니'


살아보니 그렇더라 하면서 옛 시를 다시 되뇌어본다. 이 슬픔의 날들은 언제 기쁨의 날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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