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이, 『알로하, 나의 엄마들』, 창비, 2020
내가 사는 시골 동네에는 국제결혼을 한 농촌부부들이 많다. 베트남, 일본, 태국……
어떻게 이 머나먼 첩첩산중 강원도 산골까지 와서 살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억척스레 밭에서 김을 매고, 읍사무소 한국어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며, 아기를 업고 때로는 내게 희미한 미소도 지어주는 그들을 볼 때마다 이런 데서 사는 ‘엄마’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동네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면, “윤씨네 며느리는 돈만 벌어서 베트남 친정에다 갖다 주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더라”, “문수 아저씨 태국네는 애를 낳아놓고도 본체만체한다더라”, “건넛말 황씨네는 남편이 이가 다 빠져서 결국 물렀다더라” 같은 씁쓸한 이야기도 귓가에 박혀왔다.
우리나라가 10년 간격을 두고 일본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처럼, 동남아 국가들은 10년 간격을 두고 우리나라 화(化)의 과정을 거치는 중일 것이다. 국내 모 화장품이니, 케이팝이니, 드라마니 하는 것들이 전부 동남아로 수출되어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 등장하는 버들, 송화, 홍주도 우리 동네의 국제결혼한 동남아 엄마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세 주인공이 포와(하와이의 한자 음역어)로 시집을 갔던 방식인, ‘사진결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역사는 진일보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산 아지매, 사람이 우째 그러노? 와 니한테는 좋은 자리 중신서고 내캉 송화는 저런 할배를 소개해 준 기가?”(95쪽), 홍주가 포와에 도착하여 늙수그레한 신랑을 보고 버들에게 화풀이하며 쏘아대는 장면에서, 나는 이가 다 빠져버린 우리 동네 농부 신랑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포와에 남아,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사람대접도 못 받을 과부 홍주나 무당 딸년이라 돌팔매질이나 당할 송화나, 의병 운동으로 아버지를 여읜 버들이나 조선으로 돌아가느니 포와가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던 것이다.
신기루 같은 무지개가 뜨는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셋은 가혹한 빨래터 일이든, 식당 일이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셋과 주변 한인들을 돕고 챙기며 삶을 꾸려나간다. 셋의 유대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한다는 점에선 우정이고, 부당한 것에도 꿋꿋이 함께 타지에서 삶을 가꿔나간다는 점에서는 동반자이고, 마지막에서도 송화의 자식을 제자식으로 거두는 버들의 모습에서는 이미 한 가족이다.
“버들아, 미안타. 내 올 데가 여밖에 없는 기라.”(298쪽) 돌고 돌아 올 곳이 버들뿐인 홍주의 모습, 한때 박용만 파와 이승만 파로 갈려 자신을 등졌던 홍주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갑게 맞아주는 버들의 모습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이념과 이데올로기도 이렇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랬다면, 버들의 남편 태완도 버들과 함께 한인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만일 그랬다면 홍주도 과부라는 이유만으로 하와이에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송화도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로 사람구실 못할세라 하와이까지 도망쳐 오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혐오’라던가,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이라던가, 개인의 아픈 이야기가 거대한 담론으로, 또는 역사로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의식이 얼만큼 나아왔고, 또 나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이국에서 온 아내들을 흘끗흘끗 구경할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전염되어 흘끔거리는 내가 놀랍다. 통일교라는 이유로 한국에 시집온 일본인 아줌마를 보며, 미쳤다고 종교 때문에 좋은 집안 놔두고 한국까지 시집을 오냐며 ‘사이비’에 몸서리치는 내가 맞는 건지, 아니면 사이비를 욕하는 내가 나쁜 건지 가치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가족도 뒤로한 채 독립운동에 열을 올린 태완의 모습은 어떠한가. 태완에게서는 나의 아버지를 읽을 수 있었다. 최근 꽤나 화제였던 이만희의 박근혜 시계 해프닝 때, 나의 아버지가 농민운동으로 경찰서에도 다녀오고,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기념시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늘상 손목에 걸린 아버지의 시계에 김대중 세 글자 정도 있다고 해서 내가 더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지자체에서 나눠준 줄로만 여겼다. 아마도 이만희 교주가 아니었다면 영영 관심갖지 않을 작은 소품에 불과했다.
게다가 버들과 비슷하게도, 나도 딸들 한창 어릴 때, 그런 데에 정신이 팔려있던 아빠가 못마땅했고, 물폭탄이 오가는 불안한 곳에 소리없이 열을 올리는 아빠가 참으로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엄마 말이나 잘 듣고 재산이나 불리지’. 농번기에 밀짚모자를 쓰고 나를 데리러 학교에 온 아빠가 창피한 적도 많았다. 불과 이주 전, “근데 아빠는 왜 교도소까진 안 갔어.” 무미건조한 나의 질문.
“정치라는 게 그렇지...”
나는 태완의 모습에서 독립운동 참여를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면은 보지 못했다. “내레 어린 너와 네 오마니를 두고 중국으로 갔던 거이 자식한테 독립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가정을 돌보고 내 안위를 지키는 일보담 더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댔지. 독립도 이루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돌아온 거이 원통하지만, 나도 네 오마니처럼 너마저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거이 원치 않아. …”
(374쪽)
나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의 선택이 내일의 기록에는 어떻게 적혀있을까. 오늘은 진보였으나 내일은 후퇴가 되는 일일 수도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고난과 허무와 아픔이 모여 독립이 된 것은 대단한 진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이 뛰어넘어야 했던 파도는 너무 거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