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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haus Dec 16. 2022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서평

- 1줄 서평 : 우연의 조각을 엉성히 엮어 사랑을 예찬하고 감정의 파편을 정교히 쌓아 이별을 설계한다.

- 추천곡 : 검정치마, 혜야, TEAM BABY(2017)



  상대가 내 눈에 처음 들어와 사랑을 느끼는 순간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편도행 일방향 모노드라마로 시작해 운이 좋다면 상호 동의하에 왕복 쌍방향 인터렉티브 필름을 찍을 수도 있다. 화자는 사랑이 시작되는 찰나 같은 환희의 순간을 잘게 쪼개어 미분해 예찬한다. 아무 상관도 없는 시시콜콜한 것들도 긁어모아 모든 것이 운명인 것 처럼 여기지만 그곳에서 사랑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기쁨의 순간이 스쳐가면 이별의 과정을 지리하게 밟아간다. 건축을 전공한 화자답게 일상에 파편들을 쌓아 올려 정성스럽게 이별을 설계했다.


  클로이와 윌, 단 둘만의 술자리를 만든 것은 화자 자신이다. 그 자리가 잠자리까지 이어질 리가 없다고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클로이에게 죄의식을 심어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면서 이별하기 위한 무책임한 방관이었다. 아주 잘 설계된.

[231p ‘심리적 운명론’ No.9 /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도록 그녀를 사랑했다.]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206p ‘낭만적 테러리즘’ No.10 /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을 잠근 게 아냐. 네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문을 닫은 거야. 내가 열쇠를 두었던 곳에 열쇠가 없었으니까.”]

다툼은 별 것 아닌 일들이 굉장히 중요한 일처럼 여겨질 때 발생한다. 화자는 호텔 열쇠를 두고 다투던 상황에서 책임소재를 교묘히 클로이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이렇게 읽히기도 한다. ‘내 마음에 문을 닫았어. 네가 열쇠로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닫은 건 나지만 여는건 너 책임이야.‘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고 마법의 열쇠로 닫힌 마음을 열어주길 바라는 바람은 누구나 갈구하는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클로이는 정말 그날밤 윌과 잠을 잤을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남녀 사이에 일은 둘만 아는 거다. 대신 아래 문장에서 우리는 클로이가 잠을 자지 않았더라도 윌과 잤다고 말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21p ‘이상화’ No.3 / “모르겠어요. 죄책감 때문이었나 봐요. 있잖아요, 나는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렇게 하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져요”]


  아름다운 이별이 존재할까. 포장하려 애쓸수록 남는 건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비루한 화자뿐이다. 클로이는 편지로 화자의 감정을 보듬으며 빅엿을 맥이고 떠났다. 남은 건 초라한 자신과 고결했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지질한 포장 행위다. [236p ‘자살’ No.4 / 나는 오직 나의 죽음을 통해서만 내 사랑의 중요성과 불멸을 주장할 수 있었다.] 화자는 집요히 클로이에게 죄책감을 안기고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애쓴다. 나는 이 때 왜인지 모를 분노를 느꼈다. 착한사람컴플렉스에 빠져 끝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 이거 완전 나잖아? 그 밑바닥에는 과거 이별뒤 나의 모자람을 자책하고 아픔을 자위하던 나르시시즘이 깔려있었다. 세기말 감성을 장착하고 지질한 사랑을 일삼은 그 시절 나를 향한 분노였다. ‘나의 사랑 천상에서도….’


  사랑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몰랐던 감정의 밑바닥을 발견하고 최악의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준다. 잠깐에 고통 뒤 다시 사랑이 지속될 수도 있고 이별을 직면하고 덧없는 슬픔에 빠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슬픔과 고통에 빠진 자신일까, 그것을 선사한 상대방인 걸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나는 네가 날 아프게 해서 사랑해, 난 너랑 있는 게 제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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