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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걸이와 관료주의

웃픈 조직문화 이야기

by 세이지

사회초년생 시절, 저는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회사의 인사팀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회사는 경영난으로 챕터 11 파산보호 신청을 앞두고 있었고, 급여 삭감과 업무시간 단축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 회사는 회사 상황이 어려워진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관료주의라는 결론을 내렸고, 전 직원이 이를 타파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데 집중했습니다. 우리 팀도 매주 관료주의 타파 회의를 열었지만,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관료주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중 한 동료가 퇴근할 때 팀장님의 눈치를 너무 본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퇴근할 때마다 팀장님 자리 옆의 옷걸이 때문에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옷걸이를 사무실 앞쪽으로 옮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죠. 하지만 이 제안은 팀장님의 귀에 들어갔고, 팀장님은 "내가 언제 퇴근을 못하게 했냐"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눈치를 보게 되었고, 팀장님과의 점심식사도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어느 날 팀장님이 퇴근 준비를 하시며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같이 저녁 먹을 사람?"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네! 같이 저녁 드시죠!"를 외쳤습니다.


그날 회식의 안줏거리는 다름 아닌 옷걸이였습니다. 회식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관료주의를 철폐하려다 관료주의의 끝을 보았구나.'아직도 궁금합니다. 만약 그 옷걸이가 옮겨졌다면, 우리는 정말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할 수 있었을까요? 문제는 옷걸이가 아니었겠죠. 아마도 옷걸이에 대해서 말했던 직원은 복잡했던 조직구조로 인한 의사결정의 지연, 위계화된 조직문화로 인해 퇴근조차 상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런 조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필요한 회의 등에 대한 불합리성을 옷걸이로 단순화시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옷걸이를 문 앞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던 그 직원, 지금은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시퇴근 하고 있을까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미 상사가 되어 관료주의타파에 팔을 걷어붙인 리더가 되어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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