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일기
특사(특허사무소) 탈출은 지능순. 업계에서 유행어처럼 들리는 말이다.
모두가 전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특허법인/특허사무소를 탈출하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전통적인 업무는 의뢰인의 발명을 특허출원하고 심사를 거쳐 등록까지 이르는 단계를 대리해주는 업무를 말한다. 20년 동안 수임료는 오를 생각을 않는다. 심지어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르는 지금 상황에도 특허 수임료는 든든하게 그 가격을 지켜주고 있다. 든든하다!
20년 사이 변리사의 연봉은 많이 올랐지만, 대부분 월급 받는 변리사들은 최소한 자신의 연봉의 2배만큼은 채워야 삭감 없이 계약한 연봉만큼을 가져갈 수 있다. 수임료는 20년 전과 비슷하고 채워야 하는 실적은 높아졌으니 월급 변리사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저품질의 명세서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특허 명세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으니,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서 써야 한다. 저품질 명세서를 양산한다 해서 워라밸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 야근도 밥먹듯이 하는 동기들, 5일 내내 밤 10시 이전에 퇴근해본 적 없는 동기들, 그리고 주말까지 출근해야 자신의 실적을 채울 수 있었던 동기들도 있다.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 우리 업계 이야기를 외부 사람들은 알리가 없다(업계의 괴담만 써도 브런치 글 100개는 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자중해야겠다).
척박할 대로 척박해진 이런 환경에서 모두 특사 탈출을 꿈꾼다.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지만, 그중 많은 사람들이 기업 내 변리사(인하우스 변리사)로 들어가려 한다. 나는 진심으로 특사 탈출을 꿈꾸는 모든 변리사들을 응원한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변리사다운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나도 경력 좀 어느 정도 쌓았으니 이제 슬슬 인하우스 변리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냐고? 아니다. 나는 탈출할 생각이 없다. 내가 지능이 낮아서일 수도..? 하지만 난 남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난 특허를 정말 잘 쓰고 싶다. 등록되는 특허 중에 유의미한(또는 가치가 있는) 특허는 손꼽을만한데 왜 이렇게 잘 쓰려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건 그냥 내 고집이다. 성장하는 기업들의 특허를 써주면서 그들의 성장을 서포트한다면 변리사로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성장하는 기업들에게 튼튼한 특허 성벽을 지어주고 싶다.
그러기에 나는 특사 탈출을 보류하고 특허 최전방을 지키려 한다. 그렇다고 마냥 특허 명세서만 쓸건 아니다. 기본기를 튼튼히 하고 천천히 업무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걸로 충분하다.
변리사로서 사명감을 갖고, 희망을 들고 오는 발명자들의 앞길을 다져주고 싶다. 동시에 내가 내 분야에서 실력을 쌓아나가면서 그에 맞는 값을 받으면서 일하고 싶다. 저가 수주를 하면서까지 공장처럼 특허를 찍어내며 지내는 것은 이미 경험했듯이 나를 너무 무기력하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