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 습작소>(랜덤 단어 3개) 지렁이, 심장, 크림
마음에 바르는 마취크림이 있다면 듬뿍 덜어 펴 바르고 싶었다.
'H'의 불명예는 불꽃소녀의 명예 실추나 다름없었다.
'H'의 삶이 투명해지는 걸 바란 적이 없다.
그의 사생활도 궁금하지 않았다.
사생팬과는 격이 다른 순수한 덕질이었다.
천장 위에 붙어 있는 브로마이드에는 여전히 'H'가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좋았다.
어른들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사춘기 소녀의 금사빠라고 치부했다.
소녀는 그런 눈초리와 편견이 싫었다.
그래서 몰래 'H'를 좋아했다. 불꽃소녀 덕명으로 인스타 계정을 운영했지만 오프라인에서 그 누구도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만 알고 싶었다. 그렇게 아끼고 싶었다.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언론은 이제 ' 더 세고 자극적인 H의 기사'를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발 빠른 기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H의 추락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사람들의 폭로로
많은 것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아니 엄마가 이모에게 이야기했다.
"아이고- 어쩜 저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는지. H 팬들은 다 호구야. 호구였어.
내 자식 흉이지만.. 걘 어쩐다니.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나중에 제대로 된 연애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걔 눈치 보느라고 H 그 쓸데없는 응원봉을 몇 개나 사줬는지.
이제 돈 굳었다 야"
소녀 들으라고 방문을 살짝 열었던 걸까.
아니면 우연히 문이 열린 걸까.
아니면 소녀는 엄마가 이모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그 소리가 잘 들렸던 걸까.
소녀에게 덕질이란 참 재미없는 길고 힘든 마라톤 같은 세상에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생존의 도구였다.
현실은 디스토피아, 성악설을 믿었지만
적어도 덕질을 할 땐 유토피아와 성선설을 꿈꿨다.
그러나 이젠 수치감이 올라왔다.
어쩌지 나는.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어쩌지 나는. 이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어쩌지 나는. 이렇게 호구가 돼버려서.
소녀는 예전에 과학 도서에서 읽었던 문장을 좋아했다.
[ 지렁이는 심장이 5개다. 5개의 작은 펌프가 피를 몸 전체로 보내,
5개의 심장 중 1개를 잃어도 큰 문제없다.
나머지 4개가 여전히 피를 잘 밀어내기에 지렁이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 ]
맑은 날, 쪼그라진 지렁이를 보며 소녀는 중얼거렸다. “심장이 5개라니. 대단하다”
그때부터였다. 지렁이에게 '생'의 기회가 5번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5번은 기회가 있어야 된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최애를 위한 소녀의 심장은 5개였다.
설령 심장 1개를 태워 최애를 지키는 호구가 되었어도
나머지 심장 4개가 있으니 '아직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나이논란이 있을 때 한 번.
AI 저작권 논란이 있을 때 한 번.
그리고 뒤이어 터진
팬레터 대필 논란은
그동안 주고받았던 수십 개의 메시지를 생각하면 하나로 부족해서 두 번.
그리고 마지막 심장이 사라지게 만든 건.
이 모든 걸 인정하고 사라져 버린 H였다.
이제
남은 심장이 없다.
먹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