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밴쿠버로 떠날 수 있을까..
기차출발 1분 전에 몸을 싣게 된 딸아이와 나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며 즐겁게 방금 전 일어난 일을 무용담처럼 주고받으며 한껏 들떴다.
기차 창문으로 비치는 바깥풍경은 고요했고 까만 헤드폰을 챙겨 온 아이는 인도네시아의 더운 날씨 탓에 헤드폰의 귀를 덮는 까만 가죽부위가 계속 가루처럼 흩어져 떨어진다며 챙겨 온 반짇고리를 열어 자투리천을 덮고 바느질하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들은 물건을 쉽게 사주지 않는 엄마를 탓하지만 물건의 소중함을 배워야 한다 내 원칙엔 변함이 없다.)
드디어 넉넉한 탑승시간을 남겨두고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했고 티켓팅하러 길게 늘어진 대기줄에 우리 두 명의 몸도 추가시킨다.
열흘정도의 여행이라 부치는 수화물도 각각 12,13킬로 정도로 가볍다. 이제 탑승을 위한 중요한 단계들은 모두 마쳤으니 공항 내 식당을 찾아 가볍게 아침식사를 해결한다.
이제 공항 이민국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선다. 아이를 먼저 앞세웠다. 아직 미성년자라 혹시 모르니 뒤에서 지켜보는 거다.
평소와 다르게 시간이 좀 걸린다.
문제라도 생긴 건가? 에이 아니겠지.. 검사하는 직원마다 속도 차이도 있고 옆직원이랑 얘기하느라 여유 부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리고 우린 일 년 체류 비자고 십 년 넘게 비자문제는 단 한 번도 생긴 적이 없잖아..
아이 여권과 인도네시아비자를 검사하는 시간이 평소와 달리 길어지니 혼자 별생각을 다 해보게 된다.
앞에서 검사완료를 기다리던 아이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얼른 아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본다.
"엄마.. 예전 여권 안 챙겨 왔지?"
"응.. 없는데? 왜?"
"지난 6월에 비자할 때 여권번호랑 지금 한국서 신규로 받은 여권번호가 달라서 문제가 되나 봐.."
아뿔싸.. 미성년자는 얼굴변화가 있으니 5년마다 여권을 갱신해야 하는데 지방에 사는 우리는 한국대사관이 수도인 자카르타에만 있어서 불편함이 많다.
그래서 지난여름방학 때 한국 간 김에 일 년 정도 남은 여권을 신규로 갱신해 버렸는데 일 년짜리 인도네시아 비자를 만든 건 구여권이었고 한국서 갱신하고 온 여권엔 신규 여권번호가 기입되어 있어 문제가 생긴 거다.
예전엔 출입국 할 때 한번 정도만 구여권 신여권을 같이 챙겨 다니면 됐기에 인도네시아 입국만 신경 썼지 출국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지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민국 사무실로 안내되어 갔다. 떨렸다. 탑승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쩌나..
이민국 사무실은 역시나 까칠했다. 제복을 입은 남자 한 명과 더 상급자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앉아있다.
설명인즉 아이의 여권을 신규로 발급받았으면 그에 맞게 인도네시아 체류 비자도 다시 수정신청하고 재발급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게 문제라는 거다.
"구여권을 가져와도 비자 재발급이 안되면 안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정해진 규칙인데 몰랐다면 그게 말이 안 되죠."
뜨헉.. 그녀의 말투에서부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세도 당연히 상당히 고압적이다.
게다가 한 시간가량 남은 우리가 탈 비행기의 탑승시간을 확인하고는 상급자 여자가 앞의 남자 동료에게 한 마디 한다.
"이것 봐라. 탑승시간 한 시간 남았는데 이제야 오다니 뭐 준비성이라곤.."
내 인니어 실력으론 그 말의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인니어 실력이 뛰어난 아이는 한국어로 내게 말한다.
"참나.. 말하는 것 좀 봐.. 싸가지가.. 우리가 이런 문제가 생길걸 어찌 알아.. 진짜.."
우리 둘은 일단 사무실 바깥 복도 의자가 있는 곳으로 옮겨서 잠시 기다린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약된 비행기만 해도 자카르타에서 홍콩 경유 밴쿠버까지 왕복. 그리고 밴쿠버에서 캘거리까지 왕복. 클룩으로 예매한 밴프투어 그리고 시애틀 버스와 기차 비자까지 모두 2인비용이다.
아..
우리의 멋진 여행계획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는 건가..
남편회사 에이전시에서 비자업무를 대행했으니 일단 남편에게 전화했다.
"자기야.. 어떡하지? 영이 인도네시아비자가 신규여권에 맞게 갱신이 안 돼서 출국이 안된다는데? 이민국에서 이미 연락을 한번 했을 거라는데?"
"잠시만.. 담당직원한테 물어볼게.."
어떻게 알았는지 케세이퍼시픽 항공사 직원이 우리가 있는 이민국사무실로 다급히 찾아왔다. 사무실 직원에게 상황파악을 하기 위함이다.
뭔가 매끄럽게 해결되기 어려워 보이는지 항공사직원이 내게 묻는다.
"지금 수화물 두 개가 비행기 화물칸에 들어가 있는데 혹시 탑승이 불가능하면 그걸 빼야 합니다. 지금 두 분 중 한 분만 문제가 발생한 건데 한분이 최종 못 가게 될 경우 나머지 한분은 가실 수 있으신가요? 아니면 두 분 다 탑승 못하게 되는 건가요?"
"한 명이 못 가게 되면 둘 다 못 갑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최대한 해결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항공사직원은 아주 친절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듣고 더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남편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여보세요? 자기야, 지금 우리 담당직원 바꿔줄 테니까 이민국직원이랑 통화하게 좀 연결해 줄래?"
"알았어.. 잠시만.."
그렇게 회사비자담당직원과 이민국직원 두 사람은 인니어로 상황파악 및 해결을 위해 대화를 주고받았고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아이가 <한국어>로 내게 말했다.
"엄마, 엄마 여권도 아직 검사 전이니까 그거라도 먼저 해야 되는 거 아냐?"
한국어로 한 질문인데 이민국 남자직원이 인니어로 대답한다.
"아뇨, 문제없어요. 그건 여기서 그냥 확인하면 됩니다."
나와 딸아이는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당연히 한국어를 모를 거라 생각하고 함부로 지껄인 우리의 대화 중 실수는 없었나 되짚어본다. 아이의 "싸가지"라는 단어가 좀 걸리긴 했지만 그가 그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좋지는 않길 바라는 수밖에..
해외영업부에서 십 년 일한 나의 주특기 친밀감 쌓기 공격을 마구 쏟아붓는다. 살짝 과장된 톤으로 묻는다.
"한국어를 할 수 있으세요?"
"네.. 조금요 하하하"
"어디서 배우셨어요?"
"여기 오가는 한국인들 통해서 조금씩 주워들은 거죠 하하"
"너무 잘하시는데요?"
"언어 배우는 걸 좋아해서 중국어 일어도 조금 합니다."
"오~ 대단하시네요. 저도 언어 배우는 걸 좋아해서 영어를 전공했고 인니어도 서툴지만 이렇게 조금 합니다. 하하. 중국어 일본어도 했는데 안 쓰니까 다 까먹었어요. 하하하"
이민국에선 죄가 있건없건 최대한 비유를 맞춰주는 게 좋고 그들의 심기를 건드는 말과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이제 분위기도 좋아졌고 이 참에 좀 더 잘 보이려고 한마디 더 보탠다.
"그리고 오늘 제 생일이에요 하하"
내 여권을 갖고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고압적이던 상급자는 나를 향해 <축복의 말>을 쏟아낸다.
뭔가 해결이 잘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밖에서 우리와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던 항공사직원도 조금 안도하는 표정이다.
일단 우리가 문제 있는 비자로 출국을 가능하게는 해줄 수 있지만 재입국 시는 신규여권에 맞게 수정된 비자가 있어야지만 재입국이 된다고 확인시켜 준다. 비자수정은 에이전시에서 이틀정도면 된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냉랭하기만 하던 이민국사무실은 화기애애하게 바뀌었고 그들이 준비해 온 서류에 아이본인이 서명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민국직원들에게 감사인사를 여러 번 했고 마침내 우리는 공항직원과 비행기 탑승구로 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