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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마음

[서평] 김숨 <간단후쿠>를 읽고

by 손수제비

최근 한 기사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전직 대학교수가 강의 중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이라는 취지로 발언을 했고,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이 됐다는 것. 기사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 중 자발적으로 간 사람이 다수이며 성매매 여성들을 위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같은 나라 국민으로서 참담했다.


그래, 대통령도 국민을 향해 총을 들이밀었던 나라니까. 국가조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위로나 보상을 해주지 않으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위안부'라는 존재는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전부였으니까.


김숨 작가를 떠올린다. 그의 책 <한 명>을 읽고 나서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최근 작가의 또 다른 저서인 <간단후쿠>(2025년 9월 출간)를 읽었다. 안개 같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모양과 형체를 갖춘 실체가 되었다.


책 <간단후쿠>는 내가 읽었던, 혹은 봤던 어떤 잔인한 작품보다 더 참혹했다. 눈앞에서 소녀들이 팔려가고 수십 명에게 매일 강간당한다. 굶주리거나 맞아 죽는 게 일상이다. 아이들은 '군인들 접대'를 위해 정기적으로 '위생 검사'를 받는다. 출산하지 않도록 사전에 태아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라지 못한 아이는 핏덩이째 나오기도 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삶


IE003554788_STD.jpg ▲책표지 ⓒ 민음사


책은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제목에는 소녀들의 불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삐(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중국어)", "삿쿠(일본군들이 사용하던 콘돔)", "군표('위안부'들과 관계를 맺기 전에 군인들이 내던 표)", "돌림노래(밤새 수십 번의 성행위가 이루어짐을 비유)"와 같은. 행간에 고통과 상처와 슬픔이 넘쳐 난다.


10명의 소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저마다 다른 곳으로 떠났다. 바늘공장으로, 간호사 양성소로, 군복공장으로, 신발 공장이나 만주 실공장으로. 서로 다른 장소로 떠난 그녀들은 '스즈랑'(만주에 있는 위안소)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만난다. 그들은 오직 일본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 존재했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 소녀들은 빚쟁이가 되었다. 먹고 입고 자는,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빚으로 계산되었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빚은 늘어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가 아닌, 고통과 결핍과 절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200엔이던 빚이 300엔으로 늘어나고 나서야 스즈랑에서는 모든 게 빚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고 훌쩍훌쩍 운다. 까만 바구미가 깨처럼 박힌 보리주먹밥도, 소금으로만 간을 한 수제비도, 멀건 귀리죽도, 담요도, 간단후쿠도, 칫솔도, 발가락은 다섯 개인데 구멍은 두 개여서 신으면 돼지 발이 되는 헝겊신도, 삿쿠도, 아래가 메말라 찢어지면 바르라고 나눠 준 달팽이색 연고도, 606호 주사도, 변소를 쓰는 것도, 땅에서 뽑혀 내던져진 뿌리 같은 두 발이 애써 딛고 있는 마당도, 가시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올려다보는 하늘도, 그 안에 부는 바람도, 볕도, 쪼그라들고 딱딱해져 호두가 된 가슴을 떨며 마시는 공기도." - p.52


짐승만도 못한 삶 속에서 소녀들은 생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주먹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내려치던 한 소녀는 담배를 얻어 피우고 나서야 간신히 호흡할 수 있었다.


"소독약을 마시면 죽지는 않고 입속이 수세미가 돼. 완두콩알도 못 삼킬 만큼 목구멍이 쪼그라들어 평생 염소 우는 소리를 내며 살아야 해. -p.86

"아기를 태우면 나무 태우는 냄새가 나."
"누구 아기를 태웠어?"
"내 아기. 열 달도 못 채우고 태어나 두 달 만에 죽었어. 군인들 화장하는 곳에서 화장했어. 죽은 군인들 화장터가 멀지 않은 데 있었거든.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면 군인 태우는 연기하고 재가 내가 있던 집까지 날아왔어." -p.229


10명의 소녀들이 하룻밤에 상대하는 일본군은 수백 명이 넘었다. 위생 검사를 받고,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주사를 맞아도 소녀들은 성병을 피해 가지 못했다. 병에 걸린 소녀의 방 앞에는 빨간 천이 걸렸다. 이런 경우 나머지 9명이 군인 전체를 상대해야 했다. 소녀들의 몸은 자라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녀들이 일본군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삿쿠'를 사용해 달라는 것, '군표'를 내라고 하는 것. 삿쿠는 성병, 위생과 직결되었고, 군표를 받지 못할 경우 밥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일본 군인들에게 소녀들은 항의했다. 군인들은 주먹으로 소녀들의 얼굴과 머리를 때렸다.


"다리가 구부러들며 발가락이 오그라든다. 창자가 배에 꼬이고, 늑골과 골반이 주저앉는다. 뼈들이 들뜨고 벌어진다. 무말랭이 같은 입술이 갈라지고 터진다. 혀에 혓바늘이 돋는다. 목구멍이 실오라기처럼 쪼그라들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확성기처럼 부풀어 오른 귓속에서 오토상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너희 한 명이 군인 백 명을 상대해야 한다.' 나는 군인을 스물다섯까지만 세다 만다. 계속 세다가는 군인을 백 명까지 세게 될까 봐." -p.232


몸이 부서지고 마음은 말라비틀어져 갔다. 현재의 외로움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더해져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된다 한들 소녀들이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것은 줄었던 입 하나가 다시 느는 것이니까. 엄마는 입 하나가 느는 걸 겁내 하면서도 자식을 낳고 낳았다. 편지하겠다고 해 놓고 편지 한 통 안 한 걸 두고 날 원망하면 어쩌나. 실 공장에서 돈 벌면 보내 주겠다고 해 놓고 한 푼도 보내 주지 않은 걸 두고. 엄마가 기다리는 건 '저는 건강히 잘 있어요.'라고 쓴 편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편지도, 나도. 엄마가 기다리는 건 쌀을 사고, 송아지를 사고, 밭을 살 돈인지도 모른다." - p.238


연대하는 마음


IE001909231_PHT.jpg ▲평화의 소녀상. ⓒ 권우성


김숨의 책은 아프다. 절망적이고 고통스럽다. '꼭 이렇게까지 써야만 하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말랑말랑한 시와 따뜻한 에세이를 두고, 재밌는 소설을 두고, 굳이 이런 암울한 책을 꾸역꾸역 쓰는 작가는 무슨 마음일까. 나는 뭐가 아쉬워서 <한 명>을 읽은 걸로 모자라, 연이어 <간단후쿠>를 읽고 글을 쓰고 있나.


김숨 작가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되새기고 고민하고 기록한다. 먼발치서 쳐다만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에 뛰어든다. 그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간결한 문장으로 소녀들의 삶을 펼쳐낸다. 다듬고 또 다듬으며, 작가는 출판사에 넘긴 초고에서 100매를 덜어냈다고 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위안부'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김숨 작가는 국가가 외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온 힘을 다해 품는다. 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글을 쓰며 그들이 되고자 노력한다. 작가는 이런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 것 같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한 작가의 마음, 그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진심이라는 것,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것.


아픈 만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긴다. 인기 없는 소재, 고통이 따르는 소재임에도 '꼭 읽고 싶은 책'을 써 준 김숨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쓸쓸했다. 인간이 이토록 처참할 수 있다니. 인간이 인간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 수 있다니. 이것이 정말 역사란 말인가. 이토록 아픈 것이, 자문하곤 했다. 인간이란. 인간에게 인간이란. 결국 삶이란. 수시로 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인 채로, 헤아려보았다. 어떤 마음이 이런 글을 쓰게 했을까. 우리가 버려둔 여자애들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는, 지독히도 생생한 감각". - 추천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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