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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lyn Jan 03. 2024

Prologue: 떠나는 자는 말이 참 많다


2023년 2월 13일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밤, 나는 무작정 파리 인, 밀라노 아웃의 두 달 비행기표를 끊었다. 겨울방학을 맞아 마침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고, 폭풍 전은 언제나 고요하듯이 찬 공기가 포근한 밤이었다. 물론 그 포근함은 30분 뒤 나의 폭탄선언으로 천둥 같은 고함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날 아침 나는 지하철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당시 3학년 2학기를 마친 상태였고, 남들 눈에는 막 잎을 틔운 파릇파릇한 병아리겠으나 내 나름대로는 미래와 돈, 시간, 꿈 따위의 것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앞에 앉은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몇 초간 나를 응시하셨고 나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순간 “저 사람에게 나는 인생의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엉덩이를 걷어 차인 말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달려가야 할 것만 같았다. 마치 내 뉴런이 인생의 비상 신호를 찌릿하고 전달해 준 것 같았달까.


어렸을 때부터 기상천외한 사고와 돌발행동을 자주 일으켰던 나였기에 엄마 아빠는 꽤나 빨리 내가 저지른 이 상황을 받아들여 주셨다. 물론 사전에 말씀드린 비용보다 훨씬 많은 지출을 하긴 했지만 이 주제는 얼른 넘어가도록 하자.




무언가를 배우려면 응당한 고생이 있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생각 때문에 패키지는 당연히 패스, 투어도 최소한으로 예약했고, 동행도 최소한으로 구했고, 한인민박은 쳐다도 안 봤다(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아침에 된장찌개, 미역국 등 한식이 나온다는 걸 듣고 살짝 후회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충분히 많이 고생을 했다. 파리에서 방광염 걸리고, 런던에서 코로나 걸리고, 카드 잃어버리고, 코로나 걸린 상태로 짐 3개 짊어지고 30분 등산, 달리는 차 쪽으로 택시 문 열어서 사고 내고, 한밤중에 여성전용 룸에 남자가 들어와서 코골고 자고, 공항 노숙하고, 식사 거절 등등...

말도 통하지 않는,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나를 보호하고, 뭔가가 없어지진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고, 30kg에 육박하는 짐들을 이고 지며 다니는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다. 그럼에도 후회가 되지 않았던 것은 여기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 너무나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고 배려하는 법, 문화예술을 진짜 즐기는 법, 모르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말 건네는 법, 낯선 환경에서도 대우받는 사람이 되는 법, 이성적이지만 부드럽게 거절하고 반대하는 법, 그리고 진정한 치즈의 맛!! 또한 사람의 행복은 결국 사람으로 귀결되는구나. 몇 년 전 소확행은 도전이 두려운 사람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행위일 뿐이라고 블로그에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베른의 장미정원 전망대에 앉아 쓴 것을 후회했다.

화려하고 엄숙한 바로크 건축물이나 거대한 유적지들을 보며 압도되는 경험도 즐거웠지만 유달리 기억에 남는 건 나에게만 중요한 아주 사소한 일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이다. 프랑스 리옹에서 엄청난 환대를 해준 니코와 부모님, 여동생, 할머님. 런던에서 만난 아디, 한국인 수양딸이 있다며 너무 반가워해주신 영국인 노부부. 스위스에서 만난 모니카, 키코, 로렌스. 몰타에서 만난 소피아. 이탈리아에서 만난 세자르, 클라리, 이사도라. 그리고 우연히 만난 한국분들과 동행분들까지...


이 모든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보며 지금 어딘가 홀로 여행을 꿈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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