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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Sep 04. 2023

캔자스 유학일기 시즌 2,
지금 시작합니다

의도치 않은 비즈니스석 체험기

새벽 4시 반, 한적한 도로를 빠르게 주행하는 차 안에 고등학생 둘이 잠들어 있다. 피곤에 젖은 아이들, 각각 품에 안은 커다란 가방과 사이드백, 트렁크에는 무거운 캐리어 4개를 싣고 달린다. 덜컹거림에 눈을 뜬 소녀는 감기는 눈을 비비며 밖을 바라본다. 고요한 공기를 뚫고 순식간에 그를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마음에 새기려는 듯이 유심히 관찰한다. 실제로 한동안 못 볼 광경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수학 숙제에 치이고 영어 보고서에 정신없을 때의 두 달과 여름방학 두 달은 차원이 다른 속도로 흘렀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눈을 감았다 인천 공항으로 가는 차에서 눈을 뜬 것처럼, 여름은 순식간에 떠나갔다. 그래도 작년 여름과는 다른 것이, 이번엔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얼추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출국날이 다가오자 캐리어를 미리 가장 중요한 것들로 채웠다. 바로 한국 음식. 다행히 그 덕에 출국 전날이 꽤 여유로웠다.


방학 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내가 쓴 글을 세상에 내놓을 용기를 얻었고, 새로운 작업에도 참여했다. 보통은 반대의 입장이겠지만 엄마의 간절한 부탁에 귀도 뚫었다. 

반가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아마도 '하나도 안 변했네?'일 것이다. 내가 미국에 일 년 살다 왔다고 뭐 피어싱 열 개에 진한 립스틱, 미니스커트로 무장하고 올 줄 알았던 걸까. 여러 번 말했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많이 달라져서 돌아가길 바랐던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커다란 공항 터미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나 보다. 자다 깨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유학 메이트와 함께 공항에 들어섰다. 이번 비행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우리가 비즈니스석을 탄다는 사실이었다. 여행사의 실수로 얻은 기회였는데 이런 실수라면 또 해줬으면 좋겠다고 다들 생각했다. 비즈니스석은 처음인 둘이 알아서 길을 찾으려니 굉장히 어리바리해 보였을 것이다.

아, 이번엔 여행사에서 픽업 차량이 온다길래 엄마 아빠가 공항에 함께 오지 않았다. 그런 만큼 우리가 헤어지는 것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쉬웠다. 


수속이 끝나고 안내원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자, 여기 그림에 나와 있는 라운지에서 기다리시면 돼요."

당당하게 '감사합니다'하고 걷다가 나와 유학 메이트가 동시에 말했다.

"근데 어디로 가야 되지?"

친구는 '그림에 나와 있는 곳'이라는 것밖에 기억하지 못했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말만 알아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했다. 일단 위층에 가서 그 장소를 찾아야겠다고. 공항 지도를 보고 가다 보니 우린 어느새 조용한 항공 사무실 복도를 걷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가 있을 장소는 아니었지만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계속 걸었다. 그 끝에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뿐이었다. 결국 정장을 입고 지나가시던 남자분을 붙잡고 물었다.

"죄송한데, 이 라운지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나요?"

"아, 여긴 일단 입국 수속 마치고 안에서 게이트를 찾으셔야 됩니다. 이쪽으로 가세요."

그 친절한 목소리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황급히 감사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사실 우리가 받은 그림에 게이트 번호가 쓰여 있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다신 그 친절한 아저씨를 마주치지 않기를 빌었다.




비즈니스석 라운지에 티켓을 찍고 들어서자 신기하게 늘어선 의자와 테이블, 아침 식사 뷔페에 샤워실까지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한 접시 가득 담아와 푹신한 의자에서 조용히 즐기는데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역시 돈이 좋다."


탑승 시간에 딱 맞춰 게이트를 찾아갔더니 비즈니스석 줄을 통해 몇 분 안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자리는 차원이 다르게 넓었다. 옆사람과도 엇갈려 있고 좌석을 완전히 눕힐 수도 있었다. 화면은 내 노트북보다 컸고 미리 영화들을 둘러보니 열네 시간 동안 지루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유학 메이트와는 꽤 멀리 떨어진 자리여서 미리 '미국에서 보자'라고 인사를 하고 이어폰을 꺼냈다. 귓속으로 'Wherever I Go'가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기체의 진동을 느꼈다.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런 순간은 매번 내 선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비행기가 점점 속도를 내는 그 순간에도 생각했다. 지금 내 선택이 옳은 걸까? 

선택을 여러 번 하고 그 결과를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선택을 고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 결정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것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감각을 즐기며 눈을 감았다. 또 한 번의 페이드 아웃. 

걱정이 아닌 기대를 한, 첫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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