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가 생각하는 좋은 교육
나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이 세계가 “진짜” 세계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의심은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동굴 속 죄수들처럼 이데아의 그림자를 볼 뿐일 수도, ‘통 속의 뇌’ 뿐일 수도, 또 다른 문명의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을 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의심과 가능성 속에서도 “내가 생각한다.”라는 것과 ‘나’라는 존재만은 실재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잠깐 언급했듯이, 실재하는 나를 둘러싼 사물과 생물은 내가 인식하는 대로가 실재라고 확신할 수 없다. 만물의 경계는 꽤 매끄러워 보이지만, 몇십만 배로 확대해 본다면 분자와 분자 사이가 맞물려 울퉁불퉁할 것이다. 붉음도 붉음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그 물체가 붉은 가시광선을 주로 반사하기 때문이지, 태양의 가시광선과 그것을 인식하는 눈을 매개로 하여서는 정말 그 물체의 실재 자체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기에 불가능하다. 실재를 인간이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실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어떠한가? 실재를 실제처럼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아가, 실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믿고 있진 않은가? 예를 들어, 2015개정교육과정에서는 민주 시민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민주 시민 양성이라는 것과 그것이 되기 위한 덕목은 누가 정의하는가? 정확히 대답하기는 어렵겠으나, 인식 주체와 시대에 따라 해석하는 바가 다른 그것은 온전한 실재 그 자체라고 볼 수 없다, 풀어서 설명하면, 실제적으로는 교육에서 목표로 하는 민주 시민이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그런 민주 시민상 자체가 실재하는 무언가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어딘가에 아주 완벽한 민주 시민이 실재하며, 학생들이 그 형상을 띄어야만 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완벽한 인간을 우리 사회 목적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설정하여 주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실재하는 나의 존재조차도 실재 그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실재하는 나를 인식하여 설명하고, 그것이 다시 청자에게 인식되며 실재는 실제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곡이란, 실재와 다르다는 의미일 뿐, 어떤 부정적 뉘앙스도 내포하지 않는다. 단지, 실재하는 것조차 교육할 수 없는 인간인데, 어떻게 실재하지도 않는 민주 시민상 같은 것을 교육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 특유에 오만에 기인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교육은 대체 무엇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가? 위와 같이 실재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고, 모든 진리를 부정하다 보면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고들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상에서 의심과 회의를 일삼는 필자조차 쉽게 목적을 잃고 허무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허무함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잃어지지 않는 존재는 ‘나’ 밖에 없었다. 그림자의 실재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실제로 인식하는 ‘나’는 항상 존재하고, 나는 그 실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교육은 실재를 실제로 인식하는 방법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세상에서 진리라 여겨지는 것들을 의심하고, 학생들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시금 인식하게 하여, 학생들만의 실제적 세상을 구축해 주는 것.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나의 교육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 학생들 자신이 보편적 진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행할 일이 없도록 해주고 싶다.